“중견기업 올라선 순간부터 지원 끊겨”...정부는 나 몰라라

2019-12-26 09:34
중견기업 성장성, 전년 대비 5분의 1수준
총괄 지원 기관 부재...중견기업에 대한 단계적 지원 필요

#연매출 2000억원 규모의 중견 제조업체 A사는 최근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경쟁력을 갖추려 3년 전부터 공장 확장과 연구소 설립 등 투자에 나섰지만, 내수경기가 나빠지면서 금융지원을 받기는 더 힘들어졌다. 최근엔 주52시간제를 적용하면서 공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겼다. A기업 관계자는 “지켜야 할 규제는 늘었지만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책은 없다. 이젠 설비투자보다는 살기 위해 해외 유통망을 활용한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모형제작 전문 B사는 연이어 대형 발주를 따내며 중견기업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B사 대표는 시름이 깊어졌다. 업계 특성상 공공조달 물량이 대부분인데,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 품목에 실제모형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참여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중견기업’ 꼬리표가 붙은 B사 관계자는 “20년 넘게 해온 일에 제한을 받아 타격이 크다. 자구책을 마련 중이지만 쉽지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에선 중견기업이 되는 순간 정부에서 받던 혜택이 끊기고 성장에 빨간불이 켜진다. 국내외 경기가 안 좋은 상황을 뚫고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은 규제뿐이다. 그동안 지원을 받던 기관에서도 담당 부처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해 해외 진출 사업을 진행할 때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인한 기업도 촘촘해지는 규제 앞에 대기업으로의 성장보다는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다. 성장을 외면한 채 현재에 안주하려는 ‘피터팬 증후군’이 중견기업계엔 만연해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성장성‧수익성 감소하는 중견기업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8년 중견기업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중견기업의 매출액증가율은 1.4%로 떨어졌다. 전년과 비교하면 5분의1 수준이다. 매출액증가율은 기업 성장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중견기업은 성장은커녕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수익성도 나빠졌다. 매출액영업이익률과 매출액세전순이익률 모두 전년 대비 감소했다. 매출액영업이익률은 5.7%에서 5.2%로 0.5% 포인트 줄었고, 매출액세전순이익률은 6.8%에서 4.8%로 하락했다.

특히 정책자금 조달은 조건이 까다롭고 제한적이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공동 진행한 ‘중견기업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정책자금 활용 경험이 2015년부터 3년째 줄어, 2017년에는 10% 이하로 떨어졌다.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은 “중견기업은 금융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중견기업은 대기업처럼 스스로 자금을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의 신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중견기업이 직‧간접적인 자금 조달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개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공 조달시장 입찰 자격이 제한된다는 점도 어려운 점으로 꼽힌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기업의 판로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품목을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하면, 공공조달시장에서 중견기업과 대기업은 입찰에 참여조차 할 수 없다.

중견기업을 총괄하는 정부 기관의 역할도 제한적이다. 산자부 내 중견기업 육성 등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중견기업국이 있지만 기술과 연구개발 지원 수준에 그친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근본적으로는 중견기업에 대한 정부의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중소‧벤처기업과 차별화한 수요자 중심의 정책방안들이 제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 '2018년 중견기업 기업경영분석'[출처=한국은행]


◆피터팬 증후군 없앨 규제 개선 시급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중견기업도 제자리걸음만 계속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자산규모 10조원 이상의 대기업 반열에 오른 중견기업은 카카오, 하림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장이 임기 동안 ‘규모에 의한 차별화’를 없애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3연임에 성공한 이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중견기업이 충분히 자산 10조원 이상의 대기업이 될 수 있다면, (정부에선) 기업 규모가 커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 역시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치우친 정책은 중견기업의 ‘성장 사다리’를 끊어놓고 있다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정책이 많다. 중견기업이 되면 지원이 뚝 끊기는데 정책지원 방향을 중소와 대기업을 나눠서만 할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단계적인 지원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