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왜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는가? (2)

2019-12-20 08:57
[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

[안경환 교수]



<베트남 ZOOM IN> 필자 안경환(安景煥) 조선대학교 교수 =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주경제는 최고의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는 안경환 교수의 '베트남 ZOOM IN'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안 교수는 1955년 충북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 평화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에서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10월 12일에는 하노이 수복 60주년 기념으로 하노이시에서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 개교 6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수훈했다. 2014년부터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왜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는가? (2)

∎ 베트남에서 응우옌(阮)씨가 가장 많다.
∎ 독립운동 비밀유지를 위해 개명하였다.
∎ 숭모하는 위인의 성을 따라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름뿐만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물려받는 성도 바꾸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인간에게는 의지와 관계없이 타고나는 2가지 인연이 있다. 혈연과 지연이다. 혈연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람 이름이고, 지연을 나타내는 것은 땅 이름이다. 두 인연은 인간의 생활에서 어느 것 보다도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 성명이다. 성명에서 성(姓)은 선천적이며 이름은 후천적이다. 선천적인 속성을 가진 성(姓)을 변경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사유가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베트남에서는 성(姓)의 변경사유와 사례가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생명의 탄생과 활동은 인간 개체의 성명 속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기에 성명은 곧 생명이고 자신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성과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첫째,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변경하였다.

레(黎)왕조(1428~1788) 말기에 남과 북의 영주들이 극심한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자, 중부 베트남 꾸이년에서 40km떨어진 떠이선(西山)에서 일어난 농민혁명이다. 떠이선 운동이 일어나 360년간 지속된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1771년 발생한 떠이선(西山)운동은 베트남 역사학계에서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농민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연이은 자연재해와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이를 견디지 못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떠이선 운동을 이끌고 청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던 꽝쭝(光中) 황제가 1792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베트남은 다시금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802년 남부 세력인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북부 베트남을 평정하고 최후의 전통왕조인 응우옌(阮) 왕조를 수립하였다. 이에, 지아롱(嘉隆) 황제가 된 응우옌푹아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북부지역의 영주였던 찐(鄭)씨 일족들은 자신의 성(姓)을 지아롱 황제의 성과 같은 응우옌(阮)씨로 바꾸었다. 이것이 베트남에서 응우옌(阮)씨가 가장 높은 점유율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변경하였다.

베트남의 독립투사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으로부터 체포를 피하거나 혁명 활동을 위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성명을 바꾸었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인두세를 낼 수 없는 형편이거나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못낸 죄로 구속되어 당할 고문을 피하기 위하여 신분증을 위조하여 썼다. 혁명 활동과 관련하여 1909년 대불 항쟁 운동을 하다가 일본에서 추방된 응우옌푹단(阮福旦)은 1915년 럼투언득으로 개명하고 일본에 되돌아가서 활동하였다. 강력한 항불 무력투쟁을 주도했던 독립투사 쯔엉반탐(莊文探) 역시 호앙호아탐(黃花探)으로 개명하였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의 주역으로 베트남 최초의 노벨평화상 대상자였으나, 동포들의 피가 조국의 땅에 흥건한 마당에 그 피를 밟고 영광을 누릴 수 없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부했던 레득토 3형제도 원래는 판(潘)씨였다. 3형제 모두 독립투사로 프랑스 밀정들의 수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성과 이름을 레득토, 딘득티엔(중장, 국방부차관 역임), 마이찌토(대장, 초대 공안부장관, 내무부 장관, 호찌민 시장 역임)로 각각 개명하였다. 대미 항쟁기간에도 혁명 주동세력들은 비밀유지와 원활한 투쟁을 위해서 모두 개명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자이자 독립과 혁명투사인 동시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국하고 초대 주석을 역임한 호찌민도 혁명 활동을 위해 응우옌아이꾸옥(阮愛國), 리투이, 아인바, 브엉선니 등 무려 174개나 되는 이름을 번갈아 쓰며 혁명 활동을 주도하였다.

셋째, 가정문제로 인하여 변경하였다.

가정문제로 인하여 이름을 개명하는 경우는 어느 나라고 있을 수 있는 경우이다. 가정문제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두 사람이 부부관계에 있으나 남편의 외도나 첩을 얻어 자식을 얻었지만 공개할 수 없는 처지에 있거나, 남편이 병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도망가서 연락이 두절되어 아이를 데리고 재혼을 한 경우도 있다. 부모의 반대로 사실혼 관계에 있으나 정식 결혼을 못하게 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을 경우에 그 아이는 아버지의 성 대신에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아이가 장성하고 나서 자신의 친아버지 성을 기억하도록 아버지의 성을 중간 이름으로 하여 작명한다. 유복자인 경우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작명하기도 한다.

넷째, 데릴사위로 인하여 변경하였다.

베트남 소수민족인 뚜지 사람들의 풍습에 의하면, 데릴사위는 처가의 성을 따라야 하고, 신랑은 자신의 성을 중간이름으로 사용한다. 뚜지 사람들은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곳에서 머물러 살고 성도 바꾸는 것이다. "장가 간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데릴사위 제도이다.

다섯째, 위인숭모로 인하여 변경하였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성을 따라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베트남의 독특한 문화이다. 주로 산악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위인들의 성을 자신의 성씨로 사용하였다. 성(姓)이 없었던 브루, 크우아, 항꽁, 소, 찌, 번끼에우족과 같은 소수 민족들은 1945년 8월 혁명 이후에 베트남의 민족영웅인 호찌민 주석을 숭모하여 호(胡)씨 성을 따라 자신들의 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중부 베트남의 꽝응아이성 서부 지방의 꼬, 흐레족과 같은 소수 민족들은 1960년 이전에는 딘(丁)씨였으나, 1975년 4월 30일 남부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는 거의 호(胡)씨 또는 팜(范)씨로 개명하였다. 이는 호찌민 주석을 숭배하고, 팜반동 수상과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고향에 대한 자부심으로 고향출신의 위대한 인물의 성을 따라 변경한 것이다.

여섯째, 남을 속이기 위하여 변경하였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이름을 변경하는 것으로, 일부 범죄자들이 자신의 성을 고위층의 후손인 것처럼, 친인척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개명하여 공무원들을 속이고,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고위 층의 성을 따라 자신의 성을 변경하고 사람들이 자기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먼 지역으로 이주하여 사는 경우가 있다.

유교적인 관념이 내재적인 가치관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성(姓)을 변경하는 것은 자신과 조상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위임에도 지하에서 독립․혁명 활동을 은밀하고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체포나 구금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인 의미의 일시적 가명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성(姓)의 변경의 경우 변경한 성(姓)을 후손들이 계속해서 사용하느냐 문제는 씨족 별로 다르다. 계속 사용하는 집안과 당대만 사용하는 집안도 있다. 입양의 경우라도 몇 대가 지난 뒤에는 다시금 본래의 성을 되찾는 경우가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외부침략이 많았고, 남․북간의 분쟁도 많아 가치관이나 명예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도 편의에 따라 바꾸는 실용주의를 우선시 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사회문화의 중요한 특성이다.
 

[호찌민 주석] 

 

[1010년 수도를 하노이로 천도한 이 태조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