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지상파 위기에 어른거리는 ‘붉은여왕’
2019-09-30 16:17
토끼를 따라갔다가 땅속 나라로 떨어졌던 일곱 살 소녀 앨리스는 원래 세계로 돌아온 지 겨우 6개월 만에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울 뒤편도 이상한 세계다. 칸과 칸 사이가 너무나 넓은 거대한 체스판을 누비던 앨리스는 이 세계의 물리 법칙이 자기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붉은 나라의 수장인 붉은 여왕은 느닷없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채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맨 처음 출발했던 바로 그 나무 아래다. "이상해요. 우리 세계에서는 계속해서 빨리 달리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고요.” 앨리스가 헐떡이며 외치자 붉은 여왕은 이렇게 답한다. "그것 참 느린 세계구나. 여기선 있는 힘껏 달려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단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해.” 수학자 겸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후속 편으로 1872년 펴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이다.
붉은 여왕은 시장에도 등장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인 윌리엄 바넷(William P. Barnett)은 1996년 모튼 헨슨(Morten T. Hansen)과 공동 발표한 논문 〈조직 진화 내의 붉은 여왕(The Red Queen in Organizational Evolution)〉에서 붉은 여왕 가설을 경영학에 접목시켰다.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은 기업은 시장의 승자가 되지만, 새로운 경쟁기업은 늘 나타난다. 모든 기업은 블루오션을 기대하지만 블루오션은 애초에 없었거나 아주 잠깐 있을 뿐 시장은 곧 핏빛으로 물든다. 1위 자리를 빼앗으려는 도전자는 차고 넘친다. 경쟁기업의 움직임을 살피고 분투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도태되고 만다. 상당한 기간 세계 필름사진 시장을 주도했고 심지어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건만 2012년 무너진 미국 코닥이 대표 사례다. 한때 세계 IT업계를 쥐락펴락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 역시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변화를 두려워해 도태된 거인들이다.
올해 지상파방송의 경영위기 소식을 들으면서 붉은 여왕 가설이 떠올랐다. 어떤 대상이 변화를 꾀해도 주변 환경과 경쟁자도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물고 만다는 붉은 여왕 가설은 지금의 지상파방송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상파는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경쟁자는 더 빨리 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MBC 노동조합은 ‘주저앉아 종말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제목의 절박한 성명을 냈다. “7월 25일 하루 MBC 광고매출이 1억4000만원이다. 임직원 1700명의 지상파 방송사가 여섯 살 이보람양의 유튜브 방송과 광고매출이 비슷해졌으니, MBC의 경영 위기가 아니라 생존 위기가 닥친 것이다.”
지상파 위기의 본질은 외피는 경영위기이지만 기실 콘텐츠의 위기가 아닐까. 설령 중간광고가 허용된다 해도 재정에 다소 숨통이 트일 뿐 인터넷·모바일로 빠져나간 광고주들이 과연 돌아올지 의문이다. 지상파의 진짜 위기는 시청자가 떠나고 있어 이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먼저 이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돌아오게 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지금과 같은 미디어 재편 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적응성과 기민함이 중요하다.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하는데, 지상파는 몸집이 크고 움직임은 굼뜨다. 독과점 시대의 안주 체질부터 벗어던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