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학봉선생 영정에 색깔 뺀 선글라스를 씌우다
2019-07-19 09:41
안경 쓴 옛 초상화를 처음 대한 것은 매천 황현(1855~1910) 선생 영정이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입구에 있는 사당 매천사(梅泉祠)에 봉안된 것이다. 안경 너머 쏘는듯한 눈빛 안에 가려진 서늘함이 함께 하는 이 그림은 상상화가 아니었다. 이미 그 영정의 모본이 된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한일합방 1년 전 1909년 천연당(天然堂)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라고 했다. 그 사진관 주인은 서예가 화가로 유명한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이다.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익힌 뒤 40세되던 해 서울 소공동에서 1907년 개업하여 1915년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고종임금 어진도 촬영할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장안에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손익계산에는 그리 밝지 못했던 모양이다.
황현 선생의 사진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부채를 들고 책을 펼쳐 든 모습이다. 영정사진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찍어둔 것이리라. “동그란 안경 너머 생각에 잠긴 듯 앞쪽을 정시하는 시선과 비통함을 참는 듯 살짝 다문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옷깃을 여미고 숙연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조선미 <한국의 초상화>)는 감상후기에 ‘공감!’이란 댓글을 보탰다. 촬영을 마친 이듬해 1910년 그는 망국의 한을 안고 “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키니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진(自盡)했다.
그로부터 일년 뒤 1911년 영정이 제작되었다. 두루마기(일상생활복)가 아니라 심의(深衣 예복)를 입혔고 갓(실외용)은 화려한 정자관(程子冠 실내용)으로 바꾸었으며 의자는 돗자리로 대치했다. 둥글고 소박한 뿔테안경과 책 그리고 부채는 사진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린 화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진화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다. 고종임금 흥선대원군 등 왕가 어진은 물론 항일의병 운동을 한 최익현 등 기개있는 선비 영정도 그렸다. 황현 영정 제작도 그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그가 그린 영정 3점은 뒷날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기록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까지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안경은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이 착용했다는 안경이다. 대모갑(玳瑁甲 바다거북 등껍질)으로 테를 만든 엄청 고급안경이다. 장수를 상징하며 재질이 단단하고 또 구하기가 어려운지라 고관대작과 부자만이 소유가 가능했다. 어찌보면 이 안경이야말로 당신을 대변해주는 또 다른 상징물이리라. 선생은 선조 임금의 명으로 1576년 명나라 1590년 일본을 다녀왔다. 그 무렵 안경이란 물건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피나무로 만든 안경집까지 완벽하게 남아있다.
그는 참으로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퇴계(1502~1571) 선생의 학풍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도학자이며 대궐에 있을 때는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호랑이였다.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조선침략 가능성이 없다’는 허위보고를 하고도 살아 남았으며, 임진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다양한 그의 모습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채용신이 어진화가에서 선비화가로 영역을 넓혔듯이 김호석 화백도 어진화가(노무현 대통령) 고승화가(법정스님 등)로 활약하면서 틈나는 대로 집안의 할아버지 아버지 모습을 통해 꼬장꼬장한 선비모습까지 그렸다. 마지막은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 계보를 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정으로 보건대 언젠가 그의 아들도 그 선비 계열에 줄을 세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