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방앗간 경제’의 서러움

2019-07-15 08:06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


“저희들이 언제부터 IT강국이라고...” 5년쯤 전 독일 하노버 전자박람회에서 한국기업의 부스를 지나가던 일본기업 관계자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다. 시샘과 자신감이 묻어 있는 이 말이 한·일 경제관계의 현주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게 일본은 국교정상화 이후 54년 동안 경제성장의 롤모델이었고 핵심적인 파트너였다. 한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인프라, 공장설비 등 하드웨어는 물론 법과 제도 등 소프트웨어까지도 식민지 유산으로 물려받아 계속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수출주도 성장의 길로 들어서면서 대일청구권자금을 ‘종자돈’으로 하다 보니 기술은 물론 기계, 부품, 소재의 대일 의존도는 높아졌다. 1980년대 서구에서 한국은 ‘제2의 일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이 수출주도성장을 하면서 수출이 증가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졌다. 지난 54년 동안 쌓인 적자가 700조원을 넘는다. 수출목표가 초과 달성되고 성장률이 두 자릿수가 되어도 구조적인 대일무역적자는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한국은 수입선 다변화도 시도해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적자를 줄이자는 한국의 호소에 일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일본에게 한국은 국교정상화 이후 지금까지 ‘신식민지’이다. 일본은 한국에게 언제나 고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추격 속도에 견제심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가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기보다 언제나 밀어뜨렸다. 박정희 정권의 ’태생적 한계‘도 있었지만 경제적 의존은 한국의 운신의 폭을 더욱 제약했다. 게다가 남북분단은 일본에게 좋은 지렛대가 되었다. 한국과 수교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북한과도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 원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을 돈만 아는 ‘경제동물’이라 불렀다. 1998년 한국경제가 누적되는 경상수지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자 가장 먼저 일본자본이 빠져나갔고 미국자본이 뒤를 따랐다. 작년에는 ‘통화스와프협정’의 연장을 성노예 사죄 요구와 결부시키면서 거부했다. 이번의 경제보복은 한국 경제의 ‘급소’를 겨냥하면서 한국을 굴복시키려는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영토분쟁에서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에 사흘 만에 굴복했던 자신들처럼. 그래서 과거사 문제는 물론이고 일본 초계기에 대한 한국 구축함의 레이더 조준 시비, 후쿠시마 해산물 수입금지에 대한 WTO 제소 및 패배, 비핵화 협상과정에서의 연이은 ‘일본 패싱’ 등 한국에 대한 불만을 일거에 해소하려 하고 있다.

이번 보복에 한국은 미국의 중재를 간청하지만 미국은 마치 일본과 이미 양해가 된 듯이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일본 편을 들고 있다. ‘일본도 피해를 본다’는 일본 언론의 엄살이나 ‘글로벌 공급망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라는 한가한 예상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국제 여론이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간들 상업용 고래잡이 재개처럼 일본이 막무가내로 나가면 손쓸 수 없다. 국내 불매운동도 일기 시작했지만 한국은 불매운동의 불모지이다. 정부가 언제나 기업 편에 서는 한국에서 불매운동은 ‘영업방해’로 고소당했기 때문에 성공한 적이 없다. WTO 일반이사회에서의 논의나 제소에서 성공할지라도 후쿠시마 해산물 소송에서 패한 직후 일본은 WTO를 비난한 바 있기 때문에 보복은 계속할 것이다. WTO 제소에 이긴다고 한들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보복강도를 높이면 그동안 입은 손실을 만회할 수는 없다.

한국으로서는 국제적 여론전을 통해 보복기간을 최대한 줄여야겠지만 이보다는 그동안의 방심을 철저히 반성하고 부품소재를 자체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가 흑자기조로 돌아서면서 한국은 대일무역적자에 무관심해졌다. 우리가 ‘방앗간 경제’(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를 짓는 사이에 일본은 부품소재강국을 건설했다. 부품소재산업은 중소‧중견기업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이고 괜찮은 일자리를 적지 않게 제공해줄 것이다. 정부도 부품소재산업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재벌들도 이제는 중소기업의 혁신을 ‘기술탈취’로 짓밟거나 일본 기업의 덤핑을 받아들여 국내 중소기업을 고사시키는 행태는 삼가야 할 것이다. 이번 보복에서 일본의 ‘급소’는 한국이 독자 개발로 부품소재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일본의 ‘주도면밀함’에 한국은 ‘벼락치기’로 대응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의 대응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고 있다. 그래도 고쳐야 한다. 소는 앞으로도 계속 키워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