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⑳·끝] 스틸라이프, 사라지는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

2019-06-26 10:00
자장커 감독의 2006년 역작…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中 현실 조명…자본과 육체 관계 탐구

자장커(賈樟柯)는 21세기 중국영화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감독이 ‘샤오산의 귀가(小山回家·1995)’라는 단편을 들고 나타났을 때, 중국 영화는 모종의 새로운 계기를 획득한다. 완고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중국영화를 구원한 ‘5세대’의 영화들이 반복되는 스타일과 정치적 전환, 대중적 승인을 향해 경도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들을 비판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감독들은 ‘6세대’라고 호명되면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참사 이후의 중국을 그려낸 바 있다.
 

자장커 감독. [사진=바이두]


자장커는 그보다는 조금 늦게 등장했으나, ‘5세대’와의 어떤 계승 관계조차 거부하며 가장 독립적인 영화로 중국 내부의 주변을 그려왔다. 첫 장편 ‘소무(小武·1998)’는 실업이라는 굴레 속에서 소매치기를 업으로 삼으며 ‘사회주의’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인간적 초상을 우울하면서도 경쾌한 화면으로 담아냈다.

자장커는 자신의 고향 산시성(山西省) 펀양현(汾陽縣) 문예공작단원의 이야기를 그린 ‘플랫폼(站台·2000)’,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도 없이 순간을 즐기며 떠도는 청춘들을 묘사한 ‘임소요(任逍遙·2002)’ 등 장편들을 통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의 존엄성을 그려냄으로써 영화적 역량을 구축한다.

2006년 ‘스틸라이프(三峽好人)’는 자장커 영화에서 가장 빼어난 솜씨를 보여줬다. 프랑스의 전통 있는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2007년 10대 영화 중 하나로 이 영화를 선정했고, 제63회 베니스영화제는 황금사자상을 자장커 감독에게 안겨줬다.
 
 

싼샤로 향하는 배 안에서의 싼밍(위). 아내를 찾으러 나선 싼밍(아래).[사진=영화 '스틸라이프' 캡처]


산시 지역 탄광 노동자로 살아가는 한싼밍(韓三明)은 16년 전 쓰촨(四川)에서 돈을 주고 사 온 아내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아내는 공안 당국에 적발돼 임신하자마자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아내는 딸을 낳았고, 싼밍은 그녀의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에 의지한 채 장강의 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주소지에 도착한 싼밍의 눈앞에는, 세기의 대역사라는 싼샤(三峽) 댐 공사로 인해 수몰된 채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만이 펼쳐졌다. 아내의 행방을 알 듯한 현지 사람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마을이 물로 뒤덮이고 조금 남은 집들도 차례로 철거되고 있다. 철거에 동원된 노동자들, 철거당하는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돈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결국, 아내와 딸을 찾은 싼밍은 딸을 데려가려거든 10년 전의 10배인 3만 위안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한편, 선훙(沈紅)은 싼샤 댐 수몰 지역에 다리를 놓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남편을 찾으러 이곳을 찾는다. 2년 동안이나 집에 연락이 없던 터였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찾은 선훙은 그러나 이미 그가 건설기업을 운영하는 여성 사업가, 딩야링(丁亞玲)에게 빠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짐짓 자기에게도 새 사람이 생겼노라고 호언을 하고 싼샤를 떠난다. 싼밍은 싼샤에 머무르는 동안 철거 현장에서 일하지만, 자신을 형처럼 잘 따르던 샤오마거(小馬哥)의 죽음을 목도한다. 결국 삶의 모든 현장 속에 결부된 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위험하지만, 수입이 많은 탄광 일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싼샤를 떠난다.

한싼밍은 왜 16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아내와 딸을 찾으러 나섰던 것일까. 선훙은 왜 2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연락이 끊긴 남편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영화는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펑제현(奉節縣)에서 싼밍이 머물던 허름한 여관이 철거되리라는 통지가 도착한 날, 늙은 여관 주인의 고함 소리에 담겨 있다.

그는 “2000년이나 된 마을을 2년 안에 무너뜨릴 수 있느냐”며 철거원들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므로 영화가 설정하는 시간의 둘레는 무의미한 것이다. 여관 주인의 말처럼 수천년까지는 아닐지라도 수백년은 족히 이어져 왔을 마을이 근대의 논리에 의해 깡그리 수몰되는 바로 그 시점에, 지나간 시간의 양은 허무한 것일 뿐이다. 개발의 논리는 짐짓 ‘자연’ 혹은 ‘풍토(風土)’의 복원을 묘사하는 듯하지만, 내밀한 층위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은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비자연적인지를 보여준다.

싼샤의 세계에서 시간은 더는 물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더는 개체로서의 존재를 확증해 줄 수도 없다. 그곳에 정주하던 인간은 이제 그곳을 벗어나야 할 시점에 직면해 있으며, 바깥에서 그곳으로 모여든 인간들은 존재의 ‘사라짐’이라는 과정을 목도해야만 한다.

벗어남과 사라짐, 혹은 생겨남의 길항 속에서 영화는 자본과 육체의 관계를 탐구한다. 한싼밍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공간의 사라짐을 위하여 복무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육체는 도구화된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장강을 흘러가는 배 안 남성들의 육체를 응시할 때, 이 영화가 ‘육체’의 문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음이 드러났다. 오늘날 중국에서 육체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하층 노동자들의 삶이 거기에 담겨 있다. 국가 권력과 거대 자본의 기획이 합일되는 지점에서 시간과 역사는 부정되고 사라지며, 육체마저도 상실당한다. 그곳에 정주하던 인간, 샤오마거는 경험해 보지 못한 노스탤지어로서 ‘저우룬파(周潤發)’를 꿈꾸지만 결국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마을을 떠나간다.

그러나 육체를 보증하는 것은 역시 자본이다. 영화가 지속해서 보여주는 모티브들은 ‘돈’과 관련이 있다. 싼샤에 이르는 배 안에서의 ‘마술쇼’(아이러니컬하게도 백지가 지폐로 변하는 마술을 보여주고는 관객들에게 거의 돈을 뜯어내다시피 한다), 펑제현에 도착한 싼밍이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흥정하거나, 방값을 놓고 여관주인과 승강이를 벌이고, 철거 현장에서 사고로 팔을 잃은 남자와 그 가족들의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 등은 이들의 육체가 ‘자본’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영화의 마지막, 싼밍을 따라 “죽을 수도 있을 만큼 훨씬 위험하지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탄광으로 따라나서는 노동자들의 시퀀스 역시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구성된다.

그러나 감독은 이런 일들을 담담히,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전혀 개입하지 않고 카메라에 담는다.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통해 흥분을 멈추고, 냉정을 유지하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 사회의 현실이다.

거대한 싼샤 댐이 건설되고, 그 위로 수만개의 빛을 발하는 휘황찬란한 다리가 건설돼도 여전히 하층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존재를 확증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 '스틸라이프' 포스터. [사진=바이두]


몇몇 단편들을 제외하면, 자장커는 스틸라이프의 다큐멘터리판 ‘동(東·2006)’과 ‘무용(無用·2007)’, ‘24시티(二十四城記·2007)’, ‘상해전기(海上傳奇·2010)’, ‘천주정(天注定·2013)’, ‘산하고인(山河故人·2015)’ 등을 통해 꾸준히 실험을 해오고 있다.

최근 그의 영화 정신이 윗세대와 유사한 경로를 밟으면서 변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또한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에 관한 진지한 관심, 중국 사회에 대한 꾸밈없는 솔직함, 버려진 것들에 대한 연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그가 추구하는 중요한 테제들이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