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⑲] 복잡한 삶에 관한 문제와 답안들 ‘하나 그리고 둘’

2019-05-15 09:05
2000년 양더장 감독의 문제작…갈등 속 타이베이 사회 묘사
획일화된 계몽주의적 사고 탈피…특유의 ‘시적 우울’ 분위기

타이베이(台北)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있다. 젠난쥔(簡南俊)과 아내 민민(敏敏), 두 아이 양양(洋洋)과 팅팅(婷婷),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평범한 아파트에서 그저 그런 생활을 이어간다. 젠난쥔은 별로 성공하지 못한 사업가다. 아내는 심성이 곱고 연약한 성격이다. 어린 아들 양양은 열 살밖에 안 됐지만 조숙한 편이다.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 뒷모습만 찍는다. 딸 팅팅은 음악을 배우지만 잘못된 사랑에 빠져 인생의 괴로움을 맛본다.

‘하나 그리고 둘(一一, 2000)’은 양더창(楊德昌) 감독의 문제작이다. 그는 전작 ‘독립시대(獨立時代, 1994)’에서 유가의 경전을 인용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의 한 구절이다. 위(衛) 나라에 간 공자가 “(백성이) 많구나!”라고 하자 제자 염유(冉有)가 “많으니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하고 묻는다. 공자는 “풍족하게 해 주라”고 답한다. 염유가 다시 “풍족한 다음에는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속 아들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다(위). 영화는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사진=바이두]


감독의 인용은 여기까지다. 원전에는 “가르치라”라는 대답이 실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유자(儒者)의 혼돈(A Confucian Confusion)’이다. 그는 유자의 혼돈 위에 놓여 있었다. ‘가르침’, 즉 계몽의 논리가 이 풍족한 타이베이라는 도시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혼돈이었다. 유가적 가르침으로서는 전망을 확보할 수 없는 이 우울한 도시를 향해 ‘하나 그리고 둘’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는 사뭇 도가적이다.

아내 민민의 동생 아디(阿迪)의 결혼식 날 복잡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은 이 집안의 생활 리듬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아디의 옛 애인 윈윈(雲雲)이 결혼식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젠난쥔은 30년 전 애인 시에리(謝里)를 우연히 만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양양의 외할머니는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민민은 마음의 병을 얻어 자책을 거듭한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민민은 큰 충격에 빠지고 불교 의식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양더창 감독. [사진=바이두]


양더창은 1982년 옴니버스 영화 ‘세월 이야기(光陰的故事)’의 단편 ‘지망(指望)’으로 데뷔했다. 부성과 모성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성장하는 주체의 혼돈을 그린 영화였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허우샤오센(侯孝賢) 등과 더불어 대만 영화의 새 물결, ‘신랑차오’(新浪潮)를 일으킨 인물로 부상했다.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 1983)’에서는 전통에 묶여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좌절, 인습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지만, 다시 해체에 직면하는 여성의 문제를 다뤘다. ‘타이베이 스토리(靑梅竹馬, 1985)’는 프레임을 제한하거나 재구성하는 기법을 통해 음울한 도시의 풍경을 그려냈다. 카메라는 공간을 채우지 못한 채 근대적 조직과 분할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응시한다.

이런 우울의 정조는 ‘테러라이저(恐怖分子, 1986)’에서 더욱 증폭된다. 근대적 인간과 포스트모던적 인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이 그려진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牯嶺街少年殺人事件, 1991)’은 타이베이라는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도시의 묘사에 힘썼던 그의 구체성으로의 전환과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하위문화와 지배문화의 갈등이 어떻게 권력의 분배를 통해 폭발하는지를 구체화한다. 근대와 탈근대, 계몽과 탈계몽, 국가와 탈국가 사이에 서 있는 혼돈의 타이베이를 그린 1994년 ‘독립시대’, 울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강간하고 죽이는 인간 형상에게서 글로벌 시대 타이베이의 밤을 찍은 ‘마작(麻將, 1996)’도 있다.

젠난쥔은 일본 출장길에 옛 애인을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옛 애인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젠난쥔은 여전히 젊음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 친구 앞에서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다. 결국, 그는 가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양양은 직접 쓴 ‘추도문’을 읽는다. “할머니,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중략) 저도 늙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우리말 번역 제목이 보여 주지 못하는 이 영화의 세계 인식은 조금 더 심오하다. 오프닝 크레딧 위로 ‘일일(一一)’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두 개의 글자가 세로로 정렬돼 떠오를 때 거기에는 단순하지만 복잡한 다항 결합의 세계가 다시 펼쳐진다.

‘하나(一)’와 ‘하나(一)’의 만남은 ‘하나 그리고 둘(一二)’일 수도 있으며, ‘하나 그리고 하나(一一)’일 수도 있고 그냥 ‘둘(二)’일 수도 있고 ‘둘 그리고 하나(二一)’일 수도 있다. 감독은 그런 방식으로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인식, 세계를 명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주의자의 인식에서 벗어난다.

‘하나 그리고 둘’은 삶의 복잡성에 관해 문제를 내고 그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 같은 영화다. 영화는 우리,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믿어왔던 삶의 가치와 지향들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

풍족하지는 않으나 남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정이 있다(젠난쥔의 가족 구성은 매우 자족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부와 외부로부터 던져진 충격 속에서 순식간에 현존의 가치와 지향들이 회의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옛 애인의 등장과 어머니의 부상, 사랑의 슬픔 등이 가족 저마다 풀어야만 하는 문제로 출제된다. 문제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교차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누구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써내지 못한다. 단일한 계몽주의적 답안,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만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러 의례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통해 이 영화가 우리 시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비춰봄으로써 그 안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예기치 않은, 단일하지 않은,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장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모든 결혼은 그것이 정답이라고 믿는 이들의 선택이지만, 시간이 지난 뒤 때로는 정답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장례식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문제를 끝낸 이들이 거쳐야 할 필수 경로다. 세계를 향한 철학적 물음, 왜 사진은 언제나 인간의 앞모습, 그러니까 정면만을 비춰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을 던진 양양의 추도사는 그래서 의미가 증폭된다. 열 살 난 그의 고백, “나도 늙었어요”라는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계몽적, 근대적, 현실적으로 구성해 놓은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양더창의 영화는 타이베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보편적 물음을 제기하는 데 능숙하다. 그 물음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정조는 ‘시적 우울’이다. 음울한 근대의 찬란한 도시 타이베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면과 배면으로부터 던져지는 숱한 물음들을 던져놓고, 그는 2007년 영면했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