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⑱] ‘신예 감독’ 리안 등장 알린 ‘결혼피로연’

2019-04-10 17:14
대만 출신 ‘거장’…미국서도 작품활동
동서양 넘나들며 ‘중서합벽’의 세계관

1990년대, 한 세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10년이 시작됐다. 1992년 대만영화계에는 신예 감독이 등장했다. 리안(李安, 이안)은 대만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영화를 배우고 데뷔작을 만들었다. ‘쿵푸선생(推手)’은 퇴직한 뒤 미국 뉴욕에 건너가 아들 내외와 살아가는 노년 남성을 그렸다.

그의 화면은 동양과 서양의 교차를 보여준다. 거실에서 태극권(쿵푸) 연습에 몰두하는 노인이 있다. 1분 남짓 이어지는 느릿한 쿵푸의 리듬을 따라가던 화면은 갑자기 영어 알파벳으로 가득한 컴퓨터 모니터를 비춘다. 자신의 주제의식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의 첫 솜씨가 빛나는 장면이다. 영화는 중국인 남성과 백인 여성 부부,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갈등의 ‘삼각관계’를 이야기한다. 낯선 곳으로의 장소 이동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던 아버지는 화교의 문화센터에 나가서야 다시 자신을 발견한다. 리안의 데뷔작은 대만과 미국이라는 맥락을 오가면서 이야기를 구축하는 힘을 보여줬다.

리안이 힘을 더 얻게 된 건 두 번째 영화 때문이었다. ‘결혼피로연(喜宴, 1993)’ 역시 대만과 미국의 맥락을 오가는 이야기다. 웨이퉁(偉同)의 부모는 아들이 결혼해서 손주를 안겨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웨이퉁은 동성애자다. 뉴욕에서 미국인 애인 사이먼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어느 날 부모님이 자신을 보러 찾아온다는 소식에 좌불안석이다. 동양문화에 낯선 사이먼은 오히려 웨이퉁의 부모를 잘 접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은 위장 결혼식을 꾸미기 위해 웨이퉁의 아파트에 세를 내고 사는 불법체류자 웨이웨이(威威)를 꼬드긴다. 그는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웨이퉁과 웨이웨이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뉴욕은 리안이 영화를 배웠던 곳이라 매우 친숙한 공간이었다. 리안이 대만을 오가며 영화를 세 편만 찍고, 그러니까 주로 ‘아버지 3부작’ 또는 ‘가족 3부작’이라고 불리는 ‘쿵푸선생’, ‘결혼피로연’, ‘음식남녀(飮食男女, 1994)’만을 찍고 할리우드로 날아가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국에서의 작업에 그만큼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나중에도 미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이뤄져 왔다. ‘와호장룡(臥虎藏龍, 2000)’, ‘헐크(2003)’, ‘브로크백 마운틴(2005)’, ‘색, 계(色, 戒, 2007)’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진=영화 '결혼피로연' 캡처]


미국 문화의 한복판, 뉴욕에서 가장 중국적인 결혼 피로연이 펼쳐진다. 부모의 당부, 기념사진 촬영에 뒤이어 친지가 모여들어 왁자지껄 음식과 놀이가 시작된다. 짓궂은 하객들의 요구에 예복을 갖춰 입은 신랑, 신부는 열렬히 입을 맞춘다. 신랑과 신부를 골탕먹이는 이벤트가 이어지고 멋진 음식들이 원탁을 채운다. 계략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리안은 이 영화에서도 중국과 서양의 합작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웨이퉁의 친구가 신랑을 벌줘야 한다며 나서서는 ‘중서합벽(中西合璧)’을 외친다. 중국과 서양의 장점만을 골라 취한다는 뜻의 성어다. 대만에서 뉴욕으로의 이동, 동성애에서 이성애로의 이동 등은 모두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낯선 정체성에 대한 동일화라는 맥락을 보여준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 역시 그 자체로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소수자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다수자 정체성으로 위장하는 일은 더욱 복잡한 문제들을 드러낸다. 영화는 다수자 그룹에 동화되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운 위치에 처한 이들의 정체성 은폐와 노출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사진=영화 '결혼피로연' 캡처]


피로연이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 호텔 방으로 들어간 신랑, 신부에게 다시 들이닥친 친구들은 술과 마작과 장난에 여념이 없다. 결혼을 평생의 가장 큰 일, ‘종신대사(終身大事)’라고 여겨온 중국인에게 이 정도 이벤트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신랑과 신부 둘만 침대 위에 남겨 놓는 데 성공한 친구들은 그제야 신방을 나선다.

완벽한 것처럼 보인 위장 결혼은 뜻밖의 사건으로 들통 난다. 결혼 피로연은 멋지게 성공했지만, 그 사이 웨이퉁과 사이먼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거기다 웨이웨이의 임신까지 알아차린 사이먼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다. 모두 모여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사이먼은 분노의 영어가 오가고, 진실이 드러난다.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는 아들의 말에 부모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다.

영화는 세대 간 문제, 성적 취향의 문제, 대만과 미국이라는 이질적 맥락의 문제 등을 복잡하게 다룬다. 리안의 초기작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웨이퉁 부모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회피인 듯 아닌 듯, 사이먼을 인정하는 듯 그렇지 않은 듯한 결말로 이어진다.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직접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누르고 있는 것 같은 그 표정에 관객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사진=영화 '결혼피로연' 캡처]


웨이퉁의 아버지는 사이먼을 “너도 내 아들”이라고 인정하지만, 그건 둘만의 비밀이니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 웨이웨이는 아이를 낳기로 하고 사이먼에게 또 다른 아빠가 돼 달라고 부탁한다. 두 아빠와 한 엄마, 한 아이의 흔치 않은 ‘가족의 탄생’이 이뤄진다. 아버지는 사이먼과 웨이웨이에게 모두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대만으로 돌아간다.

리안의 화제작 ‘결혼피로연’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사회적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너그러움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양쪽 극단에 있는 입장만이 아니라, 그사이에 놓여 있을 수많은 입장을 문제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그가 영화의 안과 밖에서 그렇게 강조해 왔던 ‘중서합벽’의 또 다른 은유이며, 웨이퉁은 그 자신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