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감독 "정점 찍었다 생각 안해…칸, 새 출발점 될 것"
2019-06-13 00:01
"젊은 40대 감독인데···. 정확히 말하면 49.7세! 하하하! 벌써 '정점'을 찍었다고 하고 싶지 않아요. '기생충'과 황금종려상이 새로운 출발이 되길 바라죠."
봉준호 감독(50)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네치아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는 건 2012년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후 7년 만. 칸영화제 본상 수상은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각본상) 이후 9년 만이다.
한국영화사에도, 봉 감독 개인에게도 영예로운 일이지만 그는 조심스레 "빨리 잊히길 바란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새로운 시도를 바란다는 한마디에서 황금종려상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정신이 없어요. '마더'의 원빈씨 같은 상태라고 할까. 기억의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게 돼요. 20년 전 기억부터 꺼내게 되고···하하하."
그의 말처럼 지난 5월 25일(현지시간)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뒤부터 봉 감독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전 세계 영화인들은 물론 국내외 취재진의 폭발적인 관심에 봉 감독은 인터뷰에 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돼서 못 봤어요. '기생충' 국내 개봉과 프랑스 개봉이 너무 같아서. 프랑스 배급사 측에서도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해주길 바랐지만 한국 일정이 계획돼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일정은) 칸 영화제 기간에 모두 소화하기로 했죠. 그 덕에 영화제 내내 좀비처럼 지냈지만요."
봉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나 취재진이 아닌 바로 한국 관객이었다. 오죽했으면 변장이라도 해서 영화관에 숨어들고 싶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봉 감독의 우려와는 달리 '기생충'은 개봉 당일 실시간 예매율 77.3%를 기록했고 개봉 12일 만에 721만 관객을 동원해 천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
"국내 반응이 제일 긴장돼요. 사실 칸에는 순수한 의미의 관객이 없어요. 99%가 업계 관계자죠. 진짜 관객은 지금 오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변장해서 극장에도 가고 싶은 거예요. 특히 추임새 많이 넣으면서 보시는 중년 관객 틈에서! 반응도 들으면서요. 하하하."
앞서 봉준호 감독은 칸 국제영화제 출국 전 국내 기자간담회를 통해 "칸 관객들이 영화를 100%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워낙 한국적인 영화기 때문"이라며 한국 관객들만이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한국을 담은 영화지만 동시에 전 지구적인 문제다. 우리 모두의 삶에 연관된 무엇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한다"며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한국영화인데 칸에서 먼저 공개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말한 것 같다"며 멋쩍은 반응을 보여 웃음을 유발했다.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한국 관객들과 킥킥거리면서 영화를 봐야 하는데 외국 관객들이 먼저 보게 되었으니까 '에이, 그들이 이 정서를 100% 이해하겠어?'라고 말했었던 거죠. 제가 잘했다기보다 배우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 등 양극화 문제를 잘 표현해준 거라고 봐요."
칸 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상을 받은 데다가 대대적인 호평까지 얻으면서 봉 감독은 도리어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고. 그는 "배부른 투정"이라며 조심스레 입을 연 뒤 "상을 받는 바람에 고고한 영화처럼 보일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큰 상을 받은 덕에 많은 매체에서 언급됐고, 영화 시작 전에도 떡하니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뜨니까요. 배 부른 투정이지만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됐어요. 또 대통령께서 영광스럽게 축전까지 보내주시기까지 하고···. 마치 국가적 경사처럼 다뤄져서요. 영화가 난해하거나 고고하게 예술적 향취로 무장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칸 영화제 수상 전에 영화를 틀었을 때처럼 여러 가지 희로애락을 담은 작품이니까요. 그냥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한국 관객들은 '기생충'을 어떻게 봤을까. 봉 감독은 시사회 후 관객들과 직접 만나 영화평을 들었던 일화를 풀어놓으며 "내심 기분이 좋았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파악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말미를 보고 울었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기분이 좋더라고요. 감정을 같이 나눈 거니까요. 영화 전체적으로 그런 슬픔이 깔려 있잖아요."
많은 관객이 '기생충'을 보고 눈물을 흘린 건 마지막 순간까지 섣부른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라던 아버지 기택은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며 돈을 많이 벌겠다는 아들 기우는 실패를 암시하며 씁쓸한 끝맛을 안겨준다.
"영화의 흐름도 엔딩도 솔직한 대면이라고 생각해요. 현 상황 또는 시대 모습과 솔직하게 마주하는 거죠. 물론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긴 하는데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것도 슬퍼요. 전 그걸 머금고 영화가 끝내길 바랐어요. 어찌 보면 그게 시대를 드러내는 창작자로서 솔직한 태도라고 생각했죠. 직접적인 희망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느낌은 줘요."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소주 한잔'이라는 노래도 같은 맥락이다. 봉준호가 직접 작사하고, 기우 역의 최우식이 노래를 부른 이 곡은 영화 '기생충'과 현시대를 사는 청춘들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소주 한잔'은 제가 직접 노랫말을 썼어요. 음악의 톤도 묘하게 낙관적이죠. 영화의 한 장면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마지막 목소리 같은 거라 꾸역꾸역 살아가는 느낌으로 담아봤어요. 꾸준히 살아간다는 내용이죠. 관객들이 부디 끝까지 앉아서 들으셔야 할 텐데."
'플란다스의 개'(2000)를 시작으로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8) 그리고 '기생충'(2019)에 이르기까지. 봉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며 "좋기도 불안하기도 하다"고 평했다.
"독일 뮌헨에서 '봉준호 전'을 하는데 여러 감정이 들죠. '기생충'이 경력의 정점이 될까봐요. 이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텐데. 제가 49세인데···. 젊은 40대 감독에게 정점이라니. 하하하. 칸느가 과거가 되고 빨리 잊혔으면 좋겠어요. 모범적인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요."
'젊은 감독' 봉준호는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보여줄 게 많고 또한 더욱 더 놀라운 시도를 할 예정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지금 두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에요. 미국 쪽과 2~3년 전에 계약된 게 있는데 250억~300억원 규모예요. 또 한국에서 준비 중인 건 서울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을 다루죠. 액션 혹은 드라마일 듯해요. 10년 넘게 구상한 거라 꼭 찍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