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④] ‘판관’ 포청천 얼굴에 담긴 비밀
2019-05-11 09:00
남송 이후 문학·영화 다양한 장르로 ‘환생’
검은 얼굴·이마에 초승달 ‘트레이드 마크’
흑색, 충직·냉철함…초승달, 이승·저승 의미
검은 얼굴·이마에 초승달 ‘트레이드 마크’
흑색, 충직·냉철함…초승달, 이승·저승 의미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타이완(臺灣) 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이 사건을 해결하고 끝 장면에서 항상 시원스럽게 외쳤던 대사다. 한국에서 포청천만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하던 중화권 드라마 인물도 없을 것이다.
포청천은 실제 인물로, 이름은 증(拯), 자는 희인(希仁). 포증(999~1062)은 북송 때 지금의 중국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사람이며, 인종 5년(1027년) 진사에 합격했다. 그는 여러 지역 지방관을 거쳐 개봉부 부윤, 용도각 직학사, 어사중승, 삼사사, 추밀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나 죽고 난 후에도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포증 사후 얼마 되지 않은 남송 때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 문학 작품들이 창작돼 나왔다. 또 민간에서는 신격화돼 사후 세계의 지옥 가운데 다섯 번째 지옥을 주관하는 염라천자(閻羅天子)가 됐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장르는 소설과 희곡이었다. 소설에는 남송 때 화본소설, 명대 ‘포공안(包公案)’, ‘포용도판백가공안(包龍圖版百家公案)’, 청대 ‘용도공안(龍圖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이다.
그중 ‘삼협오의’는 청말 설서(說書)예인 석옥곤(石玉昆)이 ‘포공안’과 ‘용도공안’을 120회 본으로 축약하고 삽화를 넣어 구성한 공안(公案)소설로, 당시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는 포증 이야기가 더욱 유명해졌고 이후 공연으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포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희곡 포공희(包公戱)는 남송 시기부터 공연됐고, 원대에는 잡극(雜劇)과 설서로도 성행했다. 명대에는 전기(傳奇)로, 청대에는 지방희(地方戱)와 경극 등으로 공연됐다.
현대에 들어서는 전통 시기에 창작됐던 희곡과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시청각미디어를 통해 포청천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가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가 된 셈이다.
영화는 지금까지 약 500여 편 이상 제작됐다. 드라마는 1974년부터 현재까지 타이완, 중국, 홍콩 등 중화권에서 시리즈물로 여러 편 제작됐고, 그때마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1993년 타이완 중화TV에서 제작한 ‘판관 포청천’이 1994년 KBS 2TV에서 방영돼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SBS에서도 같은 해에 타이완 중앙전영공사(中央電影公司)에서 제작한 ‘칠협오의’라는 제목으로 포청천을 다룬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후 iTV, OBS 등 여러 케이블 방송사에서도 방영됐다.
포증 이야기에 관한 원 소스 멀티 유즈 과정에서 눈에 띄게 공통으로 변함없이 전승돼 오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포증의 얼굴분장이다. 포증은 얼굴을 검게 하고 이마에 초승달을 그려 넣는 분장을 한다.
그 분장은 누구나 한눈에 그가 포증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형화됐다. 그래서 검은 얼굴에 이마의 초승달은 포증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이는 실제 포증의 얼굴 생김과는 거리가 멀다. ‘포서원기(包書院記)’에 “(그의) 초상화를 보면, 준수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포증의 얼굴분장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전통극에 사용됐던 포증 검보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검보의 분장형태는 지금 제작되고 있는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각종 캐릭터 등에 등장하는 포증의 얼굴분장에 영향을 줬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경극 ‘찰미안(鍘美案)’으로 살펴보면 더 이해가 쉽다. 극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한 여인이 개봉부 부윤 포증을 찾아와 자신의 남편 진세미를 고발한다. 진세미가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리고 황실의 부마(황제의 사위)가 됐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와 자식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포증은 이 사실을 듣고 수사를 진행한 뒤, 황실의 방해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세미의 죄를 물어 결국 참수한다.
포증의 검보는 민중들 가운데 형성된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포증의 스테레오타입을 시각적 문화코드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극의 포증 검보는 극 속 역할과 인물 특징을 색, 구도, 아이콘으로 기호화된 것이다.
포증은 흑색 정검(整臉)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검은 극에서 주인공과 같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을 표현한다. 흑색은 충직하고 사심 없이 냉철하게 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색은 뛰어난 지모와 강직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또 이마의 초승달은 낮에는 이승을, 밤에는 저승을 심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밤낮을 넘나들며 이승과 저승을 다스리는 초능력을 지녔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흑색과 백색으로 양분하고 이마에 태극문양을 그려 넣은 포증 검보도 있다.
포증 검보의 눈썹 부분은 국자(勺)형 눈썹이나 시름에 잠긴(愁殺) 눈썹을 그려 넣는다. 포증이 사건을 공평하게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포증을 부르는 명칭도 다양하다. 사건을 해결하는데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고 냉철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까맣게 분장했기 때문에 포흑자(包黑子) 혹은 포흑탄(包黑炭)으로 불렀다.
사건을 심판함에 있어서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하게 일 처리를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생활을 해 존경의 뜻으로 포공(包公) 또는 포청천(包靑天)이라고 했다. 또한, 저승에 있는 귀신들도 포증을 찾아와 억울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염라천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근 헌법재판소, 검찰, 경찰의 개혁 방안을 담은 법안들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는 등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관들이 연일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기관들 요소요소에 공평하고 지혜로운 포청천들로 포진되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기원해본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부쩍 판관 포청천이 당당하게 천하를 호령하듯이 외치는 이 말이 그리워진다.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타이완(臺灣) 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이 사건을 해결하고 끝 장면에서 항상 시원스럽게 외쳤던 대사다. 한국에서 포청천만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하던 중화권 드라마 인물도 없을 것이다.
포청천은 실제 인물로, 이름은 증(拯), 자는 희인(希仁). 포증(999~1062)은 북송 때 지금의 중국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사람이며, 인종 5년(1027년) 진사에 합격했다. 그는 여러 지역 지방관을 거쳐 개봉부 부윤, 용도각 직학사, 어사중승, 삼사사, 추밀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나 죽고 난 후에도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포증 사후 얼마 되지 않은 남송 때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 문학 작품들이 창작돼 나왔다. 또 민간에서는 신격화돼 사후 세계의 지옥 가운데 다섯 번째 지옥을 주관하는 염라천자(閻羅天子)가 됐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장르는 소설과 희곡이었다. 소설에는 남송 때 화본소설, 명대 ‘포공안(包公案)’, ‘포용도판백가공안(包龍圖版百家公案)’, 청대 ‘용도공안(龍圖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이다.
그중 ‘삼협오의’는 청말 설서(說書)예인 석옥곤(石玉昆)이 ‘포공안’과 ‘용도공안’을 120회 본으로 축약하고 삽화를 넣어 구성한 공안(公案)소설로, 당시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는 포증 이야기가 더욱 유명해졌고 이후 공연으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포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희곡 포공희(包公戱)는 남송 시기부터 공연됐고, 원대에는 잡극(雜劇)과 설서로도 성행했다. 명대에는 전기(傳奇)로, 청대에는 지방희(地方戱)와 경극 등으로 공연됐다.
현대에 들어서는 전통 시기에 창작됐던 희곡과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시청각미디어를 통해 포청천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가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가 된 셈이다.
영화는 지금까지 약 500여 편 이상 제작됐다. 드라마는 1974년부터 현재까지 타이완, 중국, 홍콩 등 중화권에서 시리즈물로 여러 편 제작됐고, 그때마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1993년 타이완 중화TV에서 제작한 ‘판관 포청천’이 1994년 KBS 2TV에서 방영돼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SBS에서도 같은 해에 타이완 중앙전영공사(中央電影公司)에서 제작한 ‘칠협오의’라는 제목으로 포청천을 다룬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후 iTV, OBS 등 여러 케이블 방송사에서도 방영됐다.
포증 이야기에 관한 원 소스 멀티 유즈 과정에서 눈에 띄게 공통으로 변함없이 전승돼 오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포증의 얼굴분장이다. 포증은 얼굴을 검게 하고 이마에 초승달을 그려 넣는 분장을 한다.
그 분장은 누구나 한눈에 그가 포증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형화됐다. 그래서 검은 얼굴에 이마의 초승달은 포증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이는 실제 포증의 얼굴 생김과는 거리가 멀다. ‘포서원기(包書院記)’에 “(그의) 초상화를 보면, 준수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포증의 얼굴분장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전통극에 사용됐던 포증 검보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검보의 분장형태는 지금 제작되고 있는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각종 캐릭터 등에 등장하는 포증의 얼굴분장에 영향을 줬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경극 ‘찰미안(鍘美案)’으로 살펴보면 더 이해가 쉽다. 극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한 여인이 개봉부 부윤 포증을 찾아와 자신의 남편 진세미를 고발한다. 진세미가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리고 황실의 부마(황제의 사위)가 됐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와 자식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포증은 이 사실을 듣고 수사를 진행한 뒤, 황실의 방해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세미의 죄를 물어 결국 참수한다.
포증의 검보는 민중들 가운데 형성된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포증의 스테레오타입을 시각적 문화코드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극의 포증 검보는 극 속 역할과 인물 특징을 색, 구도, 아이콘으로 기호화된 것이다.
포증은 흑색 정검(整臉)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검은 극에서 주인공과 같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을 표현한다. 흑색은 충직하고 사심 없이 냉철하게 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색은 뛰어난 지모와 강직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또 이마의 초승달은 낮에는 이승을, 밤에는 저승을 심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밤낮을 넘나들며 이승과 저승을 다스리는 초능력을 지녔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흑색과 백색으로 양분하고 이마에 태극문양을 그려 넣은 포증 검보도 있다.
포증 검보의 눈썹 부분은 국자(勺)형 눈썹이나 시름에 잠긴(愁殺) 눈썹을 그려 넣는다. 포증이 사건을 공평하게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포증을 부르는 명칭도 다양하다. 사건을 해결하는데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고 냉철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까맣게 분장했기 때문에 포흑자(包黑子) 혹은 포흑탄(包黑炭)으로 불렀다.
사건을 심판함에 있어서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하게 일 처리를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생활을 해 존경의 뜻으로 포공(包公) 또는 포청천(包靑天)이라고 했다. 또한, 저승에 있는 귀신들도 포증을 찾아와 억울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염라천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근 헌법재판소, 검찰, 경찰의 개혁 방안을 담은 법안들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는 등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관들이 연일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기관들 요소요소에 공평하고 지혜로운 포청천들로 포진되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기원해본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부쩍 판관 포청천이 당당하게 천하를 호령하듯이 외치는 이 말이 그리워진다.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