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③] ‘쓰촨 명물’ 변검, 중국 대표 문화공연으로 성장

2019-05-04 09:00
대중의 눈과 마음 사로잡는 기예·오락성 특징
공연 기술 전수 폐쇄성과 국가 기밀 여부 논란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변검(變臉)은 말 그대로 배우의 얼굴을 바꾸는 공연 기법이다. 공연 기법은 공연 도중 배우가 얼굴에 손으로 화장하는 방법인 말검(抹臉), 화장분을 부는 방법인 취검(吹臉), 검보를 찢는 방법인 차검(撦臉)이 있다.

최근에는 차검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배우 얼굴의 검보가 순식간에 최대 20여 차례 넘게 바뀌며 관객들의 탄성과 박수를 자아낸다. 변검은 중국 전 지역의 공연예술에서 모두 사용되고 있지만, 쓰촨(四川) 지역에서 형성된 전통 공연예술인 천극(川劇, Sichuan Opera)의 변검 공연 기법이 가장 유명하다.

쓰촨 지역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 하늘의 곳간이란 뜻의 ‘천부지국(天府之國)’이란 별칭이 붙었다. 자연스레 삶의 여유가 있는 쓰촨 사람들은 다양한 놀이문화를 만들어 즐겼는데, 그중 공연예술이 대단히 발달하여 당나라 시기에는 ‘사천의 희곡이 천하 으뜸(蜀戱冠天下)’이라고 할 정도였다.

쓰촨의 공연예술 가운데 천극은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면에서 매우 뛰어나 천부지국의 문화적 정수라는 의미인 ‘천부지화(天府之花)’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천극을 구성하는 여러 공연 요소 중에서도 고난도의 기술로 대중들에게서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변검을 천극 공연의 정점이라는 뜻에서 천극의 꽃 ‘천극지화(川劇之花)’라고 했다.

변검은 ‘관구이랑신이 교룡을 베다(灌口二郞斬健蛟)’에서 ‘푸른 얼굴로 변하다(變化靑臉)’라는 내용이 나온 것으로 봤을 때 명나라 시대에 이미 사용됐던 공연 기법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천극에서는 언제부터 사용됐던 것일까.

천극에서 변검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19세기 천극 배우 강자림(康子林, 1870~1930)이다. 그는 천극 ‘귀정루(歸正樓)’에서 협객 패융 역을 공연하면서 ‘검보를 세 번 바꾸는 기술(三變化身)’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후 변검 공연 기법은 지속해서 발전했고, 1996년 중국 국가 1급 배우(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기능·예능 보유자)인 왕다오정(王道正, 1939~현재)이 검보 24장을 바꾸는 데 성공한 뒤 ‘변검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다.

변검은 천극에서 주로 두 가지 역할을 하며 발전해왔다.

첫째, 등장인물의 심리변화를 나타낸다. 천극 ‘공성계(空城計)’에서 조조의 장수 사마의가 군대를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제갈량이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 보이지만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한 내적 심리를 변검으로 표현했다.

제갈량은 검보를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다시 청색으로 바꾸며 자신의 속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민간전설 ‘백사전(白蛇傳)’의 내용을 공연한 천극 ‘단교(斷橋)’에서 소청이 금산사 주지 허선이 자신을 배신한 사실을 알고 난 뒤 밀려오는 분노와 배신감을 변검으로 표현했다. 소청은 검보를 진홍색에서 검푸른색으로, 다시 담황색으로 바꾸며 자신의 감정을 나타냈다.

둘째, 관객에게 극에 대한 집중과 재미를 제공한다. 천극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대목마다 관객들의 시선을 끌 만한 기술적인 장치를 배치해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객이 긴장을 놓지 않게 한다.

그 장치 중 하나가 변검이다. 변검은 천극 공연 도중 서스펜스 기법을 활용해 고도의 숙련되고 화려한 공연 기술을 펼치며 관객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아 극에 몰입시킨다.

오늘날 변검은 기예성과 오락성을 부각해 문화 상품화된 기예(技藝)로 탈바꿈돼 공연장, 찻집, 식당 등 다양한 장소에서 널리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무엇보다 변검은 1995년 우톈밍(吳天明) 감독이 연출하고 주위(朱旭)과 저우런잉(周任瑩)이 주연한 영화 '변검(The King Of Masks)'이 개봉되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영화 변검은 쓰촨의 어느 변검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찾아 변검을 전수하는 내용이다. 변검왕(주위 분)은 변검을 전수하기 위해 아이를 팔고 사는 시장에서 거우아(저우런잉 분)라는 사내아이 하나를 사서 변검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거우아와 함께 지내던 어느 날, 변검왕은 사고로 다치게 돼 치료하는 과정에서 거우아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괘씸히 여기며 쫓아 버린다. 결국, 여러 우여곡절 끝에 변검왕은 거우아를 다시 거둬들이고 여자아이지만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변검을 전수한다.

쓰촨 전통기예 변검의 공연 기술 전수는 영화 변검에서 그려냈던 상황보다 더 까다롭고 제한적이다. 전수 받을 사람의 조건은 쓰촨 사람으로 남자여야 하며, 한 스승 밑에 1명에서 2명의 수제자에게만 비밀스럽게 전수됐다.

그래서 같이 공연하는 극단 단원끼리도 분장실을 따로 쓰고, 홍콩 배우 류더화(劉德華, 유덕화)도 변검왕 왕다오정에게 거액의 수업료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쓰촨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을 정도였다.

변검은 공연 기술 전수의 폐쇄성과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한 고난도의 기예 기술이다. 이 때문에 다른 전통 공연과 달리 전통기예이면서도 현대에도 일반 대중들에게 신비감과 함께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2006년 6월 변검왕 왕다오정은 중국 국가 기밀인 변검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됐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정부에 강력 조치를 요구했다. 이 문제로 중국 사회와 예술계에서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대해 국가 문화부는 1987년 국가 문화부에서 천극의 변검을 국가 2급 기밀로 제정했지만, 1989년 중국 기밀 관련 조항을 새롭게 정리할 때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에만 적용했기 때문에 변검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왕다오정이 제기한 변검의 국가 기밀 유출 논란은 단순히 해프닝만으로 치부하기엔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21세기 전 세계인이 글로벌 문화의 홍수 속에 빠져 있는 이 시점에서 전통공연 기술 변검이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현대 중국의 국가 기밀로 취급될 정도로 위상이 격상됐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이슈화시켜 온 국민에게 변검이라는 공연에 대해 새롭게 리마인드 시키고 공연 붐을 일으켰다는 점만으로도 변검은 쓰촨 지역 전통 공연예술 천극의 꽃이 아닌, 중국을 대표하는 공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왕다오정이 제기한 논란으로부터 13여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중국 대표적인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에는 2006년 6월에 있었던 소동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버젓이 중국 국가문화 2급 기밀로 지정돼 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보수국가비밀법(中華人民共和國保守國家秘密法)’ 조례에 따라 변검 기술 유출 시 형사적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라는 내용도 함께 들어가 있다. 동시에 바이두에서는 여전히 2006년 6월 변검의 국가 기밀 유출 논란 기사가 필요 이상으로 넘치게 검색되고 있다.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