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②] 돌출된 무대의 역설…각종 특수효과·소품 기능까지

2019-04-27 09:00
정면과 좌·우 세 방향서 관람하는 경극
상징적 기호로 아티스트와 관객 간 교감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속담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어도 어떻게든 대신할 방법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중국 검보(臉譜)는 경극 형성과정에서 특수효과와 소품을 대체하는 ‘잇몸’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경극 무대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양식의 움푹 들어간 무대와 달리 앞으로 돌출된 형태로 돼 있다. 관객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해서 무대 앞과 양옆에 앉아 세 방향에서 경극을 관람하게 된다.

경극의 공연방식은 무대 형태와 관객의 좌석 배치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는데, 경극 무대에서는 구조적으로 무대 배경 세트와 소품을 설치하기 어렵고 상황에 따라 극에 필요한 특수한 효과를 내기도 쉽지 않다.

마치 이 대신 잇몸으로 음식을 씹듯, 경극에서는 배우 얼굴에 색과 구도로 구성된 기본 검보에 해당 인물의 극 전개 상황에 따라 필요한 특수효과나 소품을 기호화시킨 상징 아이콘으로 표현해 직접 그려 넣어 사용하기도 한다.

먼저 대중들에게 익숙하면서도 특수효과로 처리해야 할 상황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인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를 내용으로 하는 경극 ‘봉신희(封神戱)’로 검보의 아이콘에 대해 설명해본다.

봉신희는 은나라 주왕이 경국지색인 달기에게 푹 빠져 정사를 내팽개쳐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강자아(강태공)가 하늘의 명으로 곤륜산에서 오랫동안 수행하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은나라의 제후 주나라 문왕을 도와 천명이 다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주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강자아는 주 문왕을 보필하며 은주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신선, 요괴, 도사 등을 인간 세상에 끌어들여 신들의 세계 건설에 맞춰 죽이고 신으로 봉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내용은 돌출된 경극 무대에서 신선과 요괴, 사람들이 서로 다양한 법술과 무기로 승패를 겨루는 장면으로 공연된다. 등장인물 대부분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선, 요괴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선계의 무대 배경과 법력을 나타내는 특수효과가 다른 작품에 비해 많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작품 장면에 대해 상상하고 운용의 미를 최대한 살려 검보에 시각화된 기호로 표현해 낸다.
 

[이미지=도서출판 학고방 제공]


봉신희에서 진기는 경극 ‘청룡관(靑龍關)’의 등장인물로, 청룡관을 지키는 은나라 장수 구인 휘하의 독량관이다. 진기는 주나라 진영의 정륜과 대적할 수 있는 법술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정륜과 비슷하게 적과 싸울 때 입으로 노란 가스를 내뿜어 적의 피와 살을 마르게 하고 정신을 잃게 해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지게 한다.

또한, 화안금정수를 타고 금관도촉과 탕마저를 주요 무기로 사용한다. 그의 검보는 이마에서 녹색 가스를 내뿜고 있는 모습을 그려 등장인물 진기를 표현하고 있는 홍색 화삼괴와검(花三塊瓦臉)이다.

강자아는 경극 ‘위수하(渭水河)’의 주인공으로, 주 문왕이 주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전략가를 발굴하던 도중 위수 가에서 만난 인물이다. 그는 선계에서는 신들의 세계재편 계획의 행동대장이며, 인간 세계에서는 주 문왕을 도와 은주 역성혁명을 일으켜 주나라를 세우는 일등공신이다. 그는 사불상을 타고 다니며 타신편, 행황기, 오뇌향량술을 부릴 수 있다.

그의 검보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눈썹과 하얀 수염을 그려 넣고, 그가 신통력을 부리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이마 중앙 위쪽에 하얀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노홍정검(老紅整臉)이다. 강자아처럼 신통력을 지닌 등장인물의 검보에는 대부분 이마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이와 상황이 같은 다른 봉신희 검보의 예를 들어 보면, 토행손의 황색 상형검(象形臉)과 뇌진자의 남색 상형검도 눈에 띤다.

진구공은 경극 ‘황하진(黃河陣)’의 등장인물로, 아미산 나부동에서 수련하는 조공명의 제자다. 소설 봉신연의에서의 조공명은 문중의 부탁으로 두 제자를 데리고 검은 호랑이를 타고 하산해 박색과 철편, 금교전의 보패를 사용해 강자아를 죽였다.

이후 조공명은 죽어서 강자아에게 용호현단진군으로 봉신됐고, 진구공이 포함된 여의사위정신을 관장한다. 진구공은 부를 부르는 사자인 초재사자(招財使者)로 봉해졌다. 진구공의 검보는 얼굴 양 볼에 엽전이 그려져 있고, 또 이마와 머리에는 사자를 상징하는 사슴의 뿔이 그려져 있는 남색 화원보검(花元寶臉)이다.

다음으로 검보의 아이콘은 등장인물의 머리와 신체 분장에서 해당 배역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가장 특징적인 부분을 재현하기도 한다. 다른 작품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본다.

경극 ‘적영회(摘纓會)’에 등장하는 진나라 장수 선멸은 본인이 사용하는 무기인 강차(鋼叉)가 이마에 그려진 흑색 십자문강차검(十字門鋼叉臉)으로 얼굴 분장을 한다. 경극 ‘어니하(淤泥河)’에 등장하는 요나라 장수 개소문은 극에서 당태종에게 억지로 항복의 표(表)를 쓰게 했는데, 이 표를 이마에 그려 넣은 백색 화삼괴와검(花三塊瓦臉)을 사용한다.

또한, 경극 ‘구석궁(九錫宮)’에 등장하는 설강은 아들 설규와 함께 누명을 쓰고 이를 풀어달라고 당 황제에게 엎드려 참소하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손바닥을 이마에 그려 넣은 흑색 쇄화검(碎花臉)이 쓰였다.

설강의 아들 설규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 난 것을 상징하기 위해 이마에 해바라기를 그려 넣은 흑색 쇄화검을 사용한다.

경극 ‘죽림계(竹林計)’에 등장하는 여홍은 요술을 부릴 수 있고 또 후에 그가 거처하는 죽림에 불이 나서 타 죽는 상황이 재현된 흑색 쇄화검을 사용한다. 경극 ‘상강회(湘江會)’에 등장하는 종리춘은 여장군을 상징하는 연꽃을 그려 넣은 남색 쇄여화검(碎女花臉)을 사용한다.

중국 경극 무대 형태의 특수성은 결과적으로 검보에 무대 배경과 특수효과, 그리고 등장인물의 육체적 특징 및 소품 등의 일부를 상징적인 기호로 표현해 얼굴 분장에 그려 넣어 보완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이러한 결과의 전제는 검보 생산자와 감상자인 관객 간에 오랜 시간 동안 생산과 재생산을 수없이 반복해 만들어 낸 보편적인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이해와 소통이 쌓이고 쌓여 이제 경극 검보는 무대 특수효과와 소품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된 ‘잇몸’이 아니라, 경극 공연의 특징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