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의 검보 이야기①] “아는 만큼 보인다”…다양한 인간군상 재현한 中 문화 코드

2019-04-20 09:00
오늘날 경극 분장의 대명사…중국 공연예술 시각적 이미지
600여개 배역마다 다 달라…역할 맞춰 색·구도 선택해 조합

검보(臉譜)는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 분장 중 하나로 크게 소면(素面) 분장과 도면(塗面) 분장으로 나뉜다.

소면 분장은 주로 남자 주인공인 생(生)역과 여자 주인공인 단(旦)역에 사용되며, 얼굴에 살색과 분홍색 분을 먼저 살짝 바르고 검은색으로 눈과 눈썹을 그리는 분장법이다.

도면 분장은 주로 호걸이나 악당인 정(淨)역과 어릿광대인 축(丑)역에 사용되며, 극 중 역할에 따라 색과 도안을 그려 넣는 색채 화장을 말한다.

검보는 바로 모든 정역과 축역의 도면 분장에 대한 통칭이다. 검보라는 명칭은 대략 청나라 시대 말엽에 생겨났으며, 본격적으로 문헌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화민국 초기부터다.

오늘날 검보는 일반대중들에게 경극 얼굴 분장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해당 지역의 문화적 축적물인 검보를 통해 중국의 문화적 코드와 패러다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정재 분)은 조선팔도에서 가장 용하다는 관상쟁이 내경(송광호 분)에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고 묻는다. 수양은 관상쟁이가 ‘세상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앞으로 그 사람에게 벌어질 운명과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던진 질문일 것이다.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라면, 관상쟁이처럼 먼 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인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나이, 성별, 신분, 건강상태, 기분, 성격 등은 물론 그간 살아온 과거의 모습 역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였나 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키케로도 “모든 것은 얼굴에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 검보는 중국 경극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검보는 배우의 얼굴에 해당 배역 인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시각적 상징 기호로 표현해서 그려 넣는다. 이 시각적 기호는 아주 오랫동안 배우들이 현장에서 관객들과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의미의 상징이다. 단, 한 가지 전제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보편적으로 통용됐던 문화코드를 읽어 낼 수 있는 독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배우의 검보에 그려진 갖가지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만 그 배우가 맡은 극의 등장인물에 대한 특징과 정보를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현재 경극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검보의 수는 600여개 정도 되며, 경극 외에 중국 전역의 공연에도 널리 사용된다. 이 숫자는 단순히 검보의 수량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검보로 표현된 600여 명의 인물을 의미한다.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검보는 단 한 인물도 어느 누구와 겹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많은 인물의 검보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생산됐을까? 대중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등장인물이 가장 많은 대표적인 작품인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내용으로 하는 경극 ‘삼국희(三國戱)’를 예로 검보의 생산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검보는 한자로 얼굴 검(臉), 계보 보(譜)다. 그 의미는 ‘얼굴’ 화장의 모양을 유형별로 정리해서 ‘계보화’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 단계, 삼국희(三國戱)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대표 이미지를 파악한다. 삼국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 동안 대중들에게서 형성돼 전승과 재생산을 되풀이하면서 고착된 스테레오타입이다.

대중들은 등장인물의 스테레오타입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그 인물의 행적에 대한 일방향적인 평가와 동시에, 현실에서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서 태평성대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열망이 반영됐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전통시기부터 정해져 내려온 삼국희 속 등장인물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어떠한 비판이나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현재까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 번째 단계, 검보를 만드는 사람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질서 속에서 등장인물의 스테레오타입을 시각적으로 기호화시켜 표현한다. 시각 기호의 재현방식은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상호 인지하고 있는 문화코드가 적용된 색과 구도다.

검보에서 △자색은 뛰어난 지모와 강직한 인물 △홍색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인물 △흑색은 충직하지만 지략이 떨어지는 인물 △녹색은 의협심이 강한 인물 △남색은 강하고 용맹스러운 인물 △백색은 간사하고 음흉한 인물이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 △황색은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을 나타낸다.

검보의 구도유형 가운데 △정검(整臉)은 극 배역이 비교적 큰 인물 △삼괴와검(三塊瓦臉)은 장수와 선비 등 다양한 인물 △육분검(六分臉)은 공이 높고 충직한 노장 △화검(花臉)은 영웅과 무장에 △왜검(歪臉)은 오관이 삐뚤고 못생긴 인물 △원보검(元寶臉)은 신분이 높지 않은 무장 △도사검(道士臉)은 도사나 신통술을 부리는 인물 등에 사용된다. △축검(丑臉)은 얼굴 중간에 하얀색으로 두부모양을 그려 넣는데, 남녀·노소·귀천을 불문하고 희극 배우라면 어느 배역에나 사용된다.

 

[사진=도서출판 학고방 제공]


검보는 등장인물의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해당하는 색과 구도를 선택하고 조합해서 제작됐다. 경극 ‘화용도(華容道)’에서 의리와 충절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공 관우에게는 홍색 정검, 경극 ‘군영회(群英會)’에서 비중 있는 배역인 간웅의 이미지를 가진 조조는 흰색 정검을 사용했다.

경극 ‘군영회’에서 조조의 수하이면서 주유의 첩자로 보내졌던 장간은 우스꽝스러운 역으로 축검을 사용했으며 태사자는 장간에게 으름장을 놓아 두려움에 떨게 한 주유의 수하 장수로 녹색 쇄화검(碎花臉)을, 황개는 나이가 많은 충직한 노장으로 홍색 육분검을 사용했다.

경극 ‘호화탕(芦花蕩)’에서 충직하지만, 지략이 떨어지는 이미지의 장비는 흑색 십자문호접화검(十字門胡蝶花臉), 경극 ‘박망파(博望坡)’에서 조조의 맹장인 하후돈은 남색 첨삼괴와검(尖三塊瓦臉), 경극 ‘전완성(戰宛城)’에서 하후돈의 천거로 조조의 부하가 돼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전위는 황색 화삼괴와검(花三塊瓦臉)을 사용했다.

검보는 등장인물마다 나름의 스테레오타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은 오히려 검보의 시각적 이미지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더 공고히 하기도 했다. 전통시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중국 검보의 제작 원리는 현대에도 응용돼 새로운 인물들의 검보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검보는 어떤 색과 어떤 구도일까? 아마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알려 줄 것이다.
 

[정유선 상명대 교육대학원 중국어교육전공 교수(베이징사범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