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하이브리드角]​ 산불 잡은 정치의 ‘영역 파괴’…이제는 소방관이다

2019-04-09 08:33



한강은 서울을 남북으로 가른다. 이 한강 중간에 시신이 떠올랐다면 어느 경찰서 소관일까? 이럴 때 시신 처리와 수사를 맡는 경찰서는 강북 쪽 경찰서다. 만약 시신의 발끝이 조금이라도 한강 남쪽 강변에 닿으면? 그 관할 경찰서는 강남 지역으로 바로 바뀐다. 풋내기 사회부 기자 시절 이렇게 조직폭력배 용어인 나와바리(구역을 뜻하는 일본어)를 배웠다. 경찰은 물론 검찰, 군대 등 모든 공공기관의 담당구역은 딱딱 나누어져 있다.

국민 안전과 생명 지킴이인 소방서 역시 시·군·구마다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게다가 '상전'들이 많아 독립적인 힘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 7월 청와대와 국회가 이를 완전히 바꿨다. 정치가 그 경계를 파괴, 상전을 없앴기 때문에 사상 최악의 재난이 될 수도 있었던 지난주 강원도 산불을 잘 막아냈다.

처음 불이 시작된 지난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전국의 소방차 행렬이 이어졌다. 강원도로 긴급 출동하는 각 시·도의 소방차 행렬은 서울~양양고속도로 구간 강원도 홍천군 내촌3터널 CCTV 화면에 생생하게 잡혔다. 불자동차 수십대가 일렬로 내달리는 모습을 담은 ‘속초로 향하는 영웅들’ 제목의 영상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2005년 낙산사를 전소시킨 양양 산불 당시 강원 외 지역에서 온 소방차가 96대에 불과했는데, 이번에는 800대 이상 출동했다. 소방차량이 모두 합해 872대, 소방공무원 3251명, 군 헬기 23대 등 110여대 헬기와 군인·공무원·경찰 등 총 1만7000여명이 산불 진화에 투입됐다. 사상 최대 규모의 화재 진압 작전.

과거에는 왜 이렇게 못했을까? 소방전문가들과 소방관 모두가 정치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정부조직과 사람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부는 국민안전처를 신설했다.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안전행정부의 안전관리본부와 소방방재청, 해양경찰청을 통합해 장관급 국민안전처를 신설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와 대통령의 ‘직무유기’에 대한 비판이 거세자, 정부조직법을 바꿔 “국민안전처가 국가재난 컨트롤타워”라며 ‘눈 가리고 아웅’했다. 심지어 그 장관 자리에 군 출신을 앉혔다. “안보와 안전을 구분 못 한다”는 장탄식이 나왔다. 그 결과 대형화재가 발생해도 소방공무원들은 ‘옥상옥’ 아래에 있었다. 독립적이고 자체적으로 시·도를 넘나드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칠 근거도 힘도 없었다. 119구조대가 관할지역을 넘어 출동하려면 국민안전처 장관의 지시가 있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다 2017년 정권이 바뀌고 그해 7월 20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약대로 행정안전부에 국민안전처를 흡수·통합시켰다. 중앙소방본부와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존재했던 조직을 행정안전부 산하 소방청, 해양수산부 산하 해양경찰청으로 각각 독립시켰다.

소방청 독립! 이제서야 소방청장은 국가적 차원에서 소방활동을 수행할 필요가 인정될 때 각 시·도지사에게 행정안전부령에 따라 소방력 동원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대형재난에 대해서 관할 지역과 무관하게 전국의 소방 장비와 인력을 동원할 수 있게끔 출동지침도 바꿨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교수는 인터뷰에서 “정부조직 개편으로 ‘소방청’이 독립되면서 소방 인력, 자원을 지휘하는 게 수월해졌다. 이번 산불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잡힌 건 조직개편에 따른 소방력 강화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정치가 제도를 좋게 바꿔 큰 재난을 막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 더 나아가 사람이다. 현재 5만여명 소방공무원 대부분은 지방직 공무원으로 시·도소방본부 소속이다. 쉽게 말해 잘사는 지역의 소방서와 그렇지 못한 곳의 인력과 장비 지원 격차가 너무 크다. 지자체 재정 여건이 안 좋은 곳의 소방서는 최소한의 인력도 확보하지 못해 격무에 시달리고, 부실한 장비 탓에 목숨 걸고 일한다. 청와대 국민청원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해주세요’에 8일 오후 3시 현재 참여한 인원은 모두 20만2332명이다. 거대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는 ‘소방관 눈물 닦아주기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불자동차 고속도로 출동’의 규모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국민 감동도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