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에 금 간 에르도안, 경제 개혁 약속했지만...시장은 '의심의 눈초리'

2019-04-02 15:27
에르도안, 고실업·고물가·역성장에 주요 도시 민심 잃어
에르도안 경제 개혁 약속 불구, 포퓰리즘 정책 우려 높아
美와 외교갈등·정책 불투명성·中銀 정책 한계도 문제

'21세기 술탄'을 꿈꾸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권력에 큰 상처를 입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치른 지방선거에서 잠정 개표 결과 수도 앙카라,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 3대 도시 이즈미르 모두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후보가 승리한 것으로 집계되면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앙카라와 이스탄불 결과를 두고 선관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당선자 확정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선거로 에르도안의 ‘철권’에 금이 갔으며, 그 배경엔 터키의 극심한 경제 불황이 있다는 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터키는 두 자릿수에 이르는 높은 물가상승률과 높은 실업률, 낮은 성장률로 경제가 악화일로에 있다. 터키 리라화 가치는 지난해 달러 대비 30% 이상 미끄러지면서 터키를 경기 침체로 몰아넣었다. 통화 가치가 과도하게 떨어지면 수입물가가 치솟아 소비자 구매력이 약화한다. 구매력 약화는 기업 수익 감소로 이어져 기업이 고용과 투자를 줄이는 악순환에 빠진다. 외화 부채가 많은 기업의 상환 부담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터키 경제는 지난해 마지막 2개 분기 연속 역성장 하면서 침체에 빠졌고, 12월 실업률은 13.5%까지 올랐다. 올해 2월 기준 터키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9.67%에 달했고, 3월에는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에르도안 정부는 지난주 지방선거를 앞두고 리라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역외 시장에서 리라 유동성 공급을 차단하는 개입에 나섰으나 되려 시장 공포를 부채질해 리라 급락을 초래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무디스는 1일 터키의 시장 개입이 중앙은행 정책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면서, 터키의 외환보유액 감소가 신용등급에 부정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1일(현지시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지지자가 터키 국기를 들고 에르도안 대통령 사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에르도안도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선거 종료 후 연설을 통해 자유시장 원칙에 따른 경제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에르도안의 약속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에르도안이 지속가능한 회복을 위해 근본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하기보다는 단기 성장률 높이기에만 급급할 것이라는 회의론이 짙다.

노무라의 이난 데미르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에 “투자자들은 선거 후 에르도안의 방어 자세가 강화되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재정 부양책을 늘리는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며 이는 시장 위험요인을 추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결과가 나오면서 리라화 가치가 1일 한때 2% 가까이 급락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터키 정책입안자들이 과감한 정책을 단행하기에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점도 문제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적했다. 리라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금리를 올리면 시장의 유동성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이 한층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금리를 올리지 않아 리라 가치가 더 떨어지면 달러 채무가 많은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리스크가 은행에까지 전염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크리스티안 켈러 바클레이즈캐피탈 이코노미스트는 “이것은 신뢰 게임”이라면서 “은행들의 외화 부채를 만기 연장할 수 있다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은행 리스크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는 믿음이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미국과의 외교 갈등 역시 경제를 위협할 변수로 꼽힌다. 지난해 미국은 앤드루 브런슨 미국인 목사 구금을 이유로 터키에 제재를 가하면서 리라 급락을 촉발했다. 최근에도 미국과 터키 관계가 얼어붙을 조짐이 보인다. 1일 미국은 터키가 러시아산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기로 한 것을 이유로 터키에 판매하기로 했던 F-35 전투기 부품 인도를 중단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노라 뉴트붐 ABN암로 은행 선임 전략가는 마켓워치에 “글로벌 경제가 둔화되는 상황과 터키 고유의 악재가 터키를 향한 투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투자자들이 터키 자산을 꺼리면서 리라는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2일 아시아 환시에서 리라/달러 환율은 전일비 1.4% 올라 5.56리라 부근에서 거래되고 있다. 

FT는 터키가 시장 신뢰를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조치는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터키 정부의 경제 지표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다 터키 정부가 올해 2.3% 성장률을 목표로 재정 목표 달성을 약속한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터키 정부는 경제가 다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1월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터키 경제가 위축될 것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