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하이브리드角] 여성의 날에 이뤄진 개각…30%의 함정
2019-03-08 17:13
'이승재칼럼-하이브리드각'은 20만 시간 넘게 신문, 방송 등 언론사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에서 일해 온 필자가 정치-경제-사회-문화-스포츠 등의 분야를 융복합, 넘나들고 어우르는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 여성의 날 111주년인 8일 장관 7명을 교체하는 개각을 했다.
세계 여성의 날 홈페이지와 국제노동기구 홈페이지에 따르면 여성의 날은 1857년 3월 8일 뉴욕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비롯됐다. 이날 뉴욕의 섬유·의류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후 숨죽여 살았다. 이로부터 51년 뒤, 1908년 같은 날 다시 열린 뉴욕의 여성 노동자 시위는 좀 달랐다. 무려 1만5000여명이 노동조합 결성,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이날이 세계여성의 날이 됐다.
이중 ‘화재’와 관련된 부분은 틀린 팩트다. 1911년 3월 25일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여성용 블라우스 생산 공장(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 일명 트라이앵글 화재 참사로 123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숨졌다. 이 참사로 인해 여성의 날이 전 세계로 더욱 확산되는 계기는 됐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1975년 UN이 정한 기념일은 맞다.
우리나라에서의 여성의 날은 일제 시대인 192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자유주의·우파와 사회주의·좌파가 제각각 기념식을 따로 가졌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여성의 날을 아예 취급하지도 않았다. ‘여성 빨갱이 축제일’로 여겼기에 그랬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세계 여성의 날을 공휴일로 정한 나라들은 소련(지금의 러시아), 북한, 쿠바 등 '적성국'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은 더 나아가 '38부녀절'로 부르며 여성들만 쉬는 날이다. 여성의 날을 잉태한 미국은 정작 공휴일이 아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에서는 1985년이 돼서야 비로소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개적으로 기념할 수 있었고,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개최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특히 여성의 날과 인연이 깊다. 후보 시절인 2017년 여성의 날엔 50대 여성을 위한 정책으로 “아줌마에게 이름을 돌려드리겠다. 내 아내(김정숙 여사)에게 마누라, 어머니, 할머니가 아닌 ‘정숙씨’라는 이름으로 살게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후 처음 맞이한 2018년 여성의 날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법정기념일이 됐다. 그는 당시 “우리 헌법의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임기 중 두 번 째로 맞은 올해 여성의 날에 문 대통령은 박영선 의원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7명의 장관을 교체하며 2기 내각 구성을 마무리했다. 이번 개각 전 여성 장관은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등 4명으로, 여성 장관 비율은 22.2%(18명 중 4명)이었다. 이번 개각으로 김현미 장관이 국회로 복귀하고, 박영선 의원이 입각하면서 그 비율은 그대로다. 이를 두고 문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한 여성 장관 30%에 미치지 못하며, 더 낮아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8월 개각 당시에는 18개 부처 장관 중 5개 부처 장관이 여성, 그 비율이 27.8%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김은경 환경부 장관이 물러났고 남성 장관(조명래)이 뒤를 이어 여성 장관 비율이 낮아졌고, 이번에도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여성 비율이 30%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고 그 목표를 맞추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아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번 개각 때마다 30%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각구성과 관련, “여성 장·차관 30%로 출발해 임기 중 단계적으로 ‘남녀동수내각’을 실현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 30% 내각, 남녀동수 내각 같은 숫자에 연연하는 것이 과연 실질적인 성평등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숫자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평등주의자들이여 오해는 금물, 양(量)이 아닌 질(質)을 말하는 거다. 이른바 실질적인 권력의 배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자리인 대통령 비서실장에 여성이 자리했던 적이 있는가. ‘일인지상 만인지하’ 역대 국무총리 중 유일한 여성은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제37대 한명숙 뿐이었다. 경제사령탑인 경제부총리는 어떤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국가정보원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같은 이른바 4대 권력기관의 장(長)에 여성이 올랐던 적이 있었나?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직접 내각의 여성 비율을 거론한 적이 없다. 스스로 숫자에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신 문 대통령은 (숫자가 아닌) ‘실질적 성평등 실현’을 강조해 왔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서는 “나는 특히 실질적 성평등 실현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3월에는 “사회 곳곳에서 실질적 성평등이 이루어지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내각 구성 역시 그래야 한다. 30%, 50%에 꿰맞추지 말고 권력 총합을 100%로 보고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권력의 성평등’을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