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모이' 유해진 "코미디 연기? 여행 도중 즐기는 '호두과자' 같은 거죠"
2019-01-10 07:00
영화 '말모이' 엄유나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김판수 역에 배우 유해진(48)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016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택시 운전사'를 통해 인연을 맺은 유해진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던 엄 감독은 "언제나 영화 속에서 빛나는 배우 유해진"이 "말맛 나는 영화 '말모이'"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엄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고, 안목은 정확했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분)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말모이'에서 유해진은 감옥을 밥 먹듯 드나들다 조선어학회 사환이 된 까막눈 김판수 역을 맡아 관객들의 웃음과 감동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묵직하게 관객의 눈물과 웃음을 끌어내는 판수의 모습은 유해진이 아니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순한 작품으로 새해를 맞게 돼 (기분이) 좋아요. 순두부 같기도 하고, 떡국 같기도 하죠."
유해진의 말처럼 영화 '말모이'는 자극적인 맛 없이 뜨끈하게 관객의 속을 달래는 작품이다. 그는 영화 '말모이'를 떠올릴 때면 따듯하고 순한 맛이 나는 음식들이 떠오른다고. 그러면서도 채 작품이 소화되지 않았는지 "영화를 생각하면 먹먹하다. 아직 객관적으로 영화를 평가할 수 없다"며 그의 안에 '말모이'가 남아있음을 짐작게 했다.
"아직 영화에 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여운이 남아있거든요. 개인적으로 '말모이' 현장은 정말 즐거웠어요. 감독님, 배우들과도 합이 좋았거든요. 아쉬운 점도, 좋은 점도 있지만 '작품이 어떠냐'고 한다면 선뜻 객관적인 답을 못 내놓을 거 같아요."
'택시 운전사'의 각본가와 배우로 만났던 엄유나 감독과 유해진. 두 사람은 '말모이'의 감독과 배우로 재회했다. 유해진은 엄 감독의 캐스팅 제안이 "으레 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엄 감독은 유해진의 캐스팅을 두고 "영화의 말맛을 잘 살릴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는 유해진 역시 알고 있던 사실.
"감독님 말로는 제가 '말맛'을 잘 살린다나요? 하하하. 제가 구성지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거 같아요. 듣기에 편하게 생각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대사를 걸쭉하고 구수하게 표현해서 그런 거 같아요."
그의 '말맛'은 연기적 디테일로 이어졌다. 틀에 박힌 연기를 지향하지 않는 그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 즉흥적인 상황을 끌어내곤 하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애드리브가 있느냐?"고 묻자, 유해진은 곰곰이 따져본 뒤 "극 중 등장하는 노랫말은 제가 지은 것"이라고 답했다.
"흥얼거리는 노래들은 제가 작사 작곡한 거예요. 하하하. 판수가 '노다지를 캐면 황소를 사고, 노다지를 캐면 술을 사 먹자'고 노래하는데 시대에 어울릴 법한 가사라고 생각했죠. 그때는 황소가 최고잖아요. 그런 걸 상상하면서 작사 작곡을 해요. 연기하다 보면 또 그런 재미가 있거든요. 찍으면서는 스태프들과 배를 잡고 웃었죠. '어디서 그런 노래를 만들어왔냐'고 거들면서요."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대중들은 '신라의 달밤' '왕의 남자' '타짜' '전우치' '해적' '럭키' '공조' '완벽한 타인' 등 유해진의 코미디 연기를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였던 게 사실. 이에 "코미디 연기, 이미지의 고정화에 관한 우려는 없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한 번도 그 작품들이 코미디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럭키' '완벽한 타인'이 코미디 장르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제가 출연한 영화들이 단순한 코미디 장르라고 생각지 않아요.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인 거죠. 예컨대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을 가는데 중간에 휴게소도 들러야 여행하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요? 휴게소에 들러서 호두과자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운치도 느끼는 거죠. 그간 보여드린 코미디 연기는 드라마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인 거예요. 또 개인적으로 저는 박장대소(하는 코미디 연기)보다 씩 웃을 수 있는 작품들이 더 좋아요.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작품들 말이에요."
2013년 영화 '소수의견'에서 변호사 선후배로 만났던 윤계상과 유해진은 '말모이'에서 앙숙이자 동지로 재회하게 됐다. "'소수의견' 촬영 당시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유해진은 "더 깊이 있어졌다"는 답을 남겼다.
"감히 제가 말하기는 그렇지만 (윤)계상 씨는 세월을 잘 묻히고 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더 깊어지고 있죠. 예전에는 겉돈다는 느낌도 받았었는데 이제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말도 곧 잘하더라고요. 제일 반가웠던 건 술을 잘 마실 수 있게 된 점? '소수의견' 찍을 때만 해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서 말도 잘 못 했거든요. 술자리에 함께해서 반갑다는 게 아니라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졌다는 게 반가웠어요. 닫고 있던 걸 열어두게 되었다고 할까요?"
언제나 상대 배우와 케미스트리를 빛냈던 유해진은 '말모이'에서 윤계상은 물론 아역 배우들과도 남다른 호흡을 자랑했다.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판수의 아들 덕진(조현도 분)과 순희(박예나 분)였다.
"아이들 덕에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덕진이 역을 맡은 현도는 정말 바르고 착해요. 순희 역을 맡은 예나는 보기만 해도 귀엽고요. 아역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쁘고 착하면 더 좋잖아요. 그런 면에서 두 아이는 정말 정이 많이 갔어요."
최근 '공조' '택시운전사' '레슬러' '완벽한 타인' '말모이'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한 유해진에게 2019년 새해는 어떤 의미일까?
"바람이 있다면 지난해처럼 잘 걸어갔으면 한다는 점이에요. 지난해는 제게 정말 감사한 한 해였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대접받으면서 큰 걱정 없이 맛있는 것도 사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해요. 쉽지 않겠지만 올해도 세월을 잘 묻히면서 걸어가고 싶어요. 다들 더 좋은 일들만 있으셨으면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