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독립투사의 딸, 노동자·의사·인민대표 거쳐 한국인으로
2019-01-02 02:00
독립운동가 이달 선생 딸 이소심 여사 인터뷰
"임시정부 청사 터에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았죠. 인맥을 동원해 한국 외교부에 알렸는데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 거예요."
1990년 충칭시 중심가인 위중구 롄화츠(蓮花池) 38호에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이뤄진 1945년 1월부터 1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정부 청사의 터였다.
독립운동가 이달(李達) 선생의 딸 이소심(李素心) 여사(80)는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목이 타는 듯 연신 물을 들이켰다.
이 여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중 수교 전이라 전화 통화가 자유롭지 않았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며 "한국에 있던 김신씨에게 급하게 전보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총장을 통해 다시 연락을 받은 외교부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 측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재개발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양국 간 수교 논의가 진행되던 때라 중국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1992년 수교 직후 재개발 사업이 중단되고 임시정부 청사 복원이 시작돼 3년 후인 1995년 공식 개관했다.
충칭시 인민대표(시 의원)였던 이 여사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국 정부는 1992년 이 여사의 부친인 이달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을 때 이 여사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며 노고를 치하했다.
◆고아 출신 여의사, 아버지 이력 때문에 고초 겪기도
충청도 출신인 이달 선생은 김좌진 장군이 만주 지역에 설립한 독립운동 단체 신민부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는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한 문학도였다"며 "조선이 망하자 학업을 그만두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요인 암살 등을 도모하다가 1938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선전 업무를 진두지휘한다.
이 여사는 "광복잡지 주편을 맡는 등 문학 전공자의 특기를 살려 총 대신 펜으로 항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며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자 김원봉의 비서로 임명됐다"고 설명했다.
1919년 설립된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 직전 쓰촨성 치장에 잠시 머물 때 이 여사가 태어났다. 그는 1939년생이다.
이달 선생은 1942년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이 여사는 "치장의 한인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조선인 거주 지역에 남아 있었다"고 전했다.
이달 선생의 부인은 중국인 의사였다. 요인 암살 작전 중 부상을 입고 입원한 남성을 치료하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결혼 당시에는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몰랐다.
취학 연령이 되자 어머니와 함께 한인촌을 벗어나 충칭에 정착한 이후 현재까지 머물고 있다.
11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며 고아가 됐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거쳐 1961년 어머니처럼 의사가 됐지만 고난은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부친인 이달 선생이 조선인인 데다 좌익 인사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방(下方)을 당했다. 지식인을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강제 노동을 시키는 조치다.
◆쌓여가는 그리움, 한국 국적을 선택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복권이 이뤄진 후부터는 승승장구했다. 의사로 승진을 거듭해 충칭시 난안구 제1인민병원 원장까지 지냈다.
중국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1982~1992년 충칭시 인민대표로 활동했다. 입당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남다르다.
이 여사는 "아버지와 관련된 기록을 열람하려면 입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충칭 임시정부의 의미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992년 부친을 대신해 훈장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 여사는 "그때 수훈자 13명 중 11명이 아버지의 친구였다"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1994년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백범일지를 번역해 출간했다. 2003년 공산당을 탈당하고 2005년 마침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 덕분에 기사에도 그의 이름을 리수신이 아니라 이소심이라고 쓸 수 있었다.
이 여사는 "중국은 나를 길러준 곳이지만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조국으로 되돌아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충칭에 거주 중이다. 한쪽 눈을 실명해 50대 중년의 아들이 부축을 해줘야 거동이 가능하다.
이 여사와 함께 인터뷰 장소에서 멀지 않은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소개하자 현장에서 통역 자원봉사 활동 중이던 한국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기념 촬영을 청했다.
이 여사는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충칭에 살다 보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면서도 "대한민국의 법통이자 뿌리인 임시정부를 널리 알리며 여생을 보내는 게 즐겁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