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베트남은 “박항서 같은 기업을 환영한다”

2018-12-18 05:00

 

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베트남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체구가 작은 편이어서 별로 잘 싸울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체구의 이점을 살려 사이공 인근에 거대한 지하도시 같은 구찌 터널을 파서 숨어다니고, 정글에 매복하며 기습하는 전술로 세계의 최강자 미군을 나가떨어지게 했다. 동남아 축구의 패권을 다투는 스즈키컵 결승전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전술이 그대로 재현됐다. 말레이시아 축구팀이 전력상으로는 더 강한데도 베트남 선수들의 투지와 역습에 쩔쩔맸다.

중국과 미국도 베트남에서는 패배하고 나갔다. 16일 하노의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베트남전 때 베트콩과 월맹군이 들고다녔던 금성홍기(金星紅旗)가 펄럭일 때마다 4만 관중이 환호를 보냈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동남아에서 공산화의 도미노가 일어날 것으로 우려하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베트남 통일 후에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는 공산화하지 않고 건재했다.

통일 베트남이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親)중국 크메르 루즈 정권을 전복시키고 친베트남 정권을 세우자 중국은 20만명의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무력 침공을 했다. 덩샤오핑은 베트남 침공 직후 미국을 방문해 “조그만 친구가 말을 안들어 엉덩이를 때려줘야겠다”고 말했지만 엉덩이를 된통 맞은 것은 중국이었다. 이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수만명이 죽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베트남군은 1989년까지 캄보디아에 주둔했다.

한베경제문화협회와 아주경제가 14일 주최한 한-베 비즈니스 포럼에서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은 “한국과 베트남의 과거사에 사과를 드린다. 이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에 대한 설 의원의 사과는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으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부띠엔록 베트남 상공회의소 회장은 “설훈 의원의 사과는 감동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축구팀의 궁합이 맞아서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15일 한국인들도 베트남을 응원해달라. 베트남 축구팀이라고 부르지 말고 한-베 축구팀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압박하는 미국에 떠밀려서였음이 기밀 해제된 미국의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8년 동안 1만6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현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베트남인들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겨놓았다.

전쟁 후 43년이 지난 지금 한국-베트남 관계는 경제와 한류를 중심으로 상전벽해가 됐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최대 수출기업이 되었고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하고 있다. 요즘 한국의 제조업은 탈(脫)한국 탈중국의 흐름이 뚜렷하다. 삼성전자도 휴대폰을 생산하는 톈진 공장을 연말에 가동 중단할 계획이다. 한국의 반도체 공장이 중국에서 얼마나 버틸지도 미지수다.

반면에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는 2017년 전체 해외투자의 17.7%까지 늘어났고 중국은 27.6%로 줄어들었다. 베트남은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고 근로자들의 근면성과 숙련도가 높다. 올해 6.8% 경제성장이 예상되는 베트남은 경제부문에서 동남아의 지도국이 돼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기업과 경제관련 단체 사무소들이 동남아 본부를 싱가포르에서 베트남으로 옮기고 있다.

응우옌부뚜 주한 베트남 대사는 14일 한-베 비즈니스 포럼에서 “박항서 감독은 한국에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중에서 박항서 감독 같은 기업이 많이 나오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충돌이 잦은 다혈질 독불장군이어서 한국에서는 명문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포항스틸러스에서는 후배인 최순호 감독 밑에서 코치로 일했다. 그는 3부 리그 격인 창원시청에서 감독을 하다가 베트남에 가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을 할 때 그 밑에서 수석 코치를 하면서 배운 노하우를 현지에 창의적으로 접목했다는 평을 듣는다.

축구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어제 하노이와 호찌민에서는 금성홍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걸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SBS는 스즈키컵 중계권을 1000만원대에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결승 2차전 시청률이 SBS스포츠 채널을 합해 20%를 넘는 대박을 쳤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20만명에 이른다. 한국 사람들이 하노이나 호찌민의 식당에 들어가면 밥값을 안 받겠다는 곳이 많다고 한다. 박항서는 피파(FIFA) 랭킹 100위에 불과한 축구팀을 이끌고 베트남 국민을 하나로 묶어냈다. 한국에서 3부 리그로 밀려났던 작은 축구 감독 한명이 한-베트남 민간 외교의 신기원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