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익 칼럼] ​칸트 앞에 선 AI...보헤미안 랩소디가 예술인 이유

2018-12-06 11:18
- 예술은 어?로 시작해 아!로 끝나는 것


예술은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야 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지난달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예술은 미적 주체가 새로운 관념을 만들고, 그 해석을 관철시키는 행동”이라고 했다. 새로우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셀 뒤샹이 설치한 변기가 예술이 된 건 이같은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 ‘어?’하고 놀랐다. 돈을 내고 미술품을 감상하러 왔는데 떡 하니 변기가 놓여있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서 끝났다면 뒤샹의 변기는 예술이 될 수 없었다. 뒤샹은 변기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아니라 그 것을 선택해 전시한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뒤샹은 이로써 관객을 새로운 판단의 도전앞에 세웠다. 이를 예술로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평단은 고민 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대중은 새로운 감성적 자극을 받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와!’로 끝난 것이다.

진중권의 관점은 칸트가 배경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근대 예술철학의 기초를 세웠다. 칸트에게 예술이란 기존의 잣대로는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야 한다. 동시에 칸트는 판단의 결과 보편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악으로 판단하는 보편적 윤리가 있듯 똥을 더럽게, 꽃을 아름답게 여기는 심미적 보편성이 있다는 게 칸트 생각이다.

예술가는 일단 일을 한다.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여기까지는 창작이 아니라 생산이다. 예술의 범주로 끌어올리는 건 관객의 몫이다. 통념을 깨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가서서 자세히 듣고 보게 해야 한다. 자꾸 들어보고, 쳐다본 결과 아름답다고 느껴야 한다.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런 관점에서 예술이다. 락과 오페라를 결합한 6분짜리 하이브리드에 관객은 경악했다. 평단이 혹평으로 맞이한 이 곡에서 관객은 무한히 확장되는 감성적 경험을 했다.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곡으로 받아들였다. 

‘인공지능(AI)이 예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AI가 생산한 음악과 그림이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예술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가 예술한다는 미명아래 생산물을 쏟아내지만 어?로 시작해 와!로 끝나지 않으면 그저 제품이다. 

지난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랑스 AI 어비어스가 그린 ‘에드몽 드 벨라미’란 초상화가 약 5억원에 낙찰됐다. 에드몽 드 벨라미는 빅데이터와 딥러닝의 결과물이다. 개발자는 14~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1만5000여점을 입력해 학습시켰다.

시장 가격은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예술과는 별개다. 낙찰자는 AI가 그린 그림 중 최초의 낙찰품이란 희소성이 미래가치를 보증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경제적 판단이다.  

에드몽 드 벨라미는 일단 관객을 새로운 판단의 무대위로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AI의 그림을 예술로 봐야하는가’란 질문이 화두가 된 것만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이 초상화가 미적 보편성을 만족하는 가는 좀 더 지켜볼 문제다. 보는 이에 따라 벨라미 초상화는 그저 눈도 코도 뭉개진 이상한 그림에 불과하다. 

에드몽 드 벨라미가 예술로 인정될 경우 그림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어비어스가 법인격, 즉 독립된 주체로 인정되면 비로소 AI가 예술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림값 5억원의 소유권은 어비어스가 아니라 개발자의 몫이었다. 법적으로 보면 어비어스는 창작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사진 예술품의 소유권이 사진기가 아니라 사진기의 주인에게 있는 것과 같다.

가까운 미래엔 AI가 작품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해 11월 AI를 전자인간, 즉 법인격으로 인정했다. 올해 2월엔 AI에게 살인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결의안에 서명도 했다. AI가 개발자의 지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강정석 MIT 대학교 미디어랩 AI 연구원은 “기술이 이 정도로 발전하는 건 시간의 문제”라고 했다.

AI가 예술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은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AI가 예술가가 되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관객에게 기존 관념을 깨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지의 문제다. 부언하면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