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혜수 "'국가부도의 날', 이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했다"
2018-11-29 17:47
지난 28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개봉 첫날 30만 관객을 동원, 박스오피스 1위로 시작을 알렸다. 성적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여성 관객들은 한시현이라는 캐릭터에 주목했고 그가 끌고 가는 드라마에 환호했다.
사실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이나 진중한 성격, 냉철한 이성을 가진 ‘리더’는 많은 영화에서 다뤄왔다. 그러나 그 ‘리더’가 여성일 경우 또 그 캐릭터를 김혜수가 맡게 되었을 경우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성별만 뒤집었을 뿐인데도 영화는 기존 작품들과 결을 달리하고 캐릭터는 더 많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건네게 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우 김혜수(48)가 있다. 냉철하고 강직하며 당당한 태도로 시종 드라마를 쥐락펴락하는 그는 그간 관객들이 김혜수에게서 보았던 혹은 보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이기도 해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배우 김혜수의 일문일답이다
- 한시현은 영화 속 인물이니 정제되어있고 잘 갖춰져 있다. 제가 한시현을 생각했을 땐 불의나 부당함을 위해 싸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캐릭터다. 투사가 아니라 소임을 다하는 인물인 거지. 이에 대해 ‘기존 영화였다면 한시현이 남자 캐릭터인 게 자연스럽다’고도 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연기할 때 ‘여성이기 때문에 더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한시현 그 자체로서 자신의 자리에서 제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한 거다.
그 시절 금융조직이 보수적이다 보니 여성 팀장 캐릭터가 낯설었을 수도 있겠다
- 특히 금융조직이니까. 제작진과 한국은행 관계자에게 ‘실무자 중 여성이 있었냐’고 물으니 ‘아마 없었을 거’라고 하더라. 지금보다 더 남성 중심 사회였고 금융 쪽은 훨씬 더 보수적이었으니까.
- 제작진에게 따로 요청했다. 경제 전문가 역인데 대사만 외워서 할 수는 없으니까. 영화 배경이 외환 위기 당시이니 그 상황도 잘 알아야 하는데 저는 내막에 관해서는 몰랐으니까. 상황도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경제 용어·언어가 체화되어야 하는데 입에만 붙는다고 그 느낌이 잘 살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를 요청했고 아주 쉬운 언어로 경제 공부를 해나갔다.
언제부터 공부한 것들이 체화되는 느낌이 들었나?
- 글쎄. 잘 모르겠다. 시간이 되는대로 공부했고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촬영 직전까지 틈틈이 공부했던 것 같다.
영어 대사도 그렇지 않나. 일상 대화가 아닌 경제 용어였는데
- 특히 협상 장면은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받고 2주 뒤부터 영어 대사를 준비했다. 단어도 바꿔보고 톤도 여러 가지로 연습해보고…. 이것이 대사가 아니라 일상적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말에 대한 부담이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출연을 결심하고부터는 말에 대한 훈련을 계속해왔다.
그간 많은 영화를 해왔는데 기존 작품 중에서도 ‘국가부도의 날’은 촬영 전 준비할 게 많았던 편인가 보다
- 그렇다. ‘모던보이’는 노래, 춤을 추는데도 시기적으로 몇 번 배우지 못했다.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데 하루를 시작해 자기 직전까지 노래를 듣고 외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거의 스케줄을 짜서 시간을 들여 공부한 편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캐릭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전문가 역이나 교수 직함을 달았어도 연애를 주로 하는 캐릭터여서. 하하하.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 사람의 직업이 실제 영화의 실체니까. 더 전문적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IMF를 기억하고 있나?
- 27살쯤이었는데 당시에도 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저도 IMF에 관해 잘 몰랐다. 그저 가까운 사람들이 갑작스레 변화된 환경을 맞게 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갑자기 이민을 하거나 이사를 가야 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뉴스를 잘 안 봐서 어떤 상황을 맞게 되었는지는 몰랐으나 어제 다녀온 백화점들 미도파, 뉴코아 같은 곳이 문을 닫고 망했다고 하니까.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든 생각은 무엇이었나? 작품 선택 당시의 상황과 생각이 궁금하다
- 이 작품을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이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꼭 잘 만들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안 하더라도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부로 선택할 수 없었다.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 출연도 화제가 됐다
- 일반 관객으로서 (뱅상 카셀이) 매력적인 마스크를 가져서 좋아했었다. 그분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IMF 총재는 워낙 중요한 인물인데 그 역할을 맡아준다니. 이분도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더라. 이런 영화를 만드는 한국 영화인들의 태도를 궁금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아마 다들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함께 호흡을 맞춰보니 어땠나? 팬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 스크린으로만 봤던 사람이 걸어오니까. 하하하. 그리고 일단 멋지지 않나. 솔직히 일차적으로는 멋져서 놀랐다. 하지만 함께 연기할 땐 협상 신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내 사정이고. 주고받는 말들이 경직되어 있고 공식적이라서 어떤 긴장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배우로서) 할 건 다 한다는 점이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해외 배우들과 연기 호흡 맞춰본 적이 없어서 궁금증이나 기대감도 있었는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당시에는 한시현을 연기하느라 벅차서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었는데 완성본을 보고 많은 걸 느꼈다.
김혜수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나 보다
- 연기하는 쾌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한시현으로서 엄중한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런 식으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점에 놀랐다고 할까? 좋은 배우는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는 거다. 그분도 영어로 연기를 했으니 자기 언어가 베이스가 아닌데도 존재감이 달랐고 잘 해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외국 배우더라도 우리나라 영화에서 보면 어색할 때도 있지 않나. 그런데 그런 이질감이 전혀 없더라. 짧고 강렬하고 특별했다. 뱅상 카셀이야 말로 특별출연인데 좋은 예인 거 같다.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던 한시현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시 평범한 ‘우리’를 대변하는 갑수(허준호 분)와 한시현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면서부터다
- 출생의 비밀인 셈이다. 하하하. 가만히 (영화를) 보면 다들 갑수를 ‘한사장’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아마 연결 고리를 못 찾으셨을 거다. 사실 갑수와 시현이 남매가 아니더라도 영화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독립적이어도 자연스러운데 이 사건이 실제 나의 형제, 가족에게 영향을 준다면 정말 괴로웠을 거다. 시현의 감정이 훨씬 배가 될 거라고 본다. 시현은 가정이 없는 인물이다. 남편과 아이가 없는 싱글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모든 일을 충실히 하다 보니 돌아볼 곳도 여유도 없는 거다. 제가 생각하는 한시현은 당연히 가족은 있으나 케어 할 정도의 여유는 없다고 보았다.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고 싶었으나 막지 못했고 좌절했고 사표를 던졌으며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여기에 재난 속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 나의 가족이었다면…. 자괴감과 좌절감, 무력감에 빠졌을 거다. 그의 눈물은 ‘아무것도 못 했어’가 아니라 자괴감이나 자멸감, 상실감과 죄책감이었을 거라고 본다.
극 중 한시현이 김혜수와 닮은 곳이 있다면?
- 비슷한 면이 꽤 있다. 다만 한시현은 우리가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저보다 고르게 갖춰져 있지. 일관성도 있는 편이다. 다만 어떤 부분에서 교집합은 있다. 영화를 보고 온 한 친구는 ‘완전 너던데? 말할 때나 화낼 때나 울 때나. 다 너야!’라고 하더라. 난 다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하하하. 나라고 생각하고 연기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