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 서민우·지정우 건축가 "창의적 어른으로 키우려면 맘껏 뛰놀 놀이터 필요하죠"
2018-11-19 09:00
지정우 "아이들과 워크숍하며 아이디어 얻고 지금까지 못해본 경험 만들어주려 노력"
서민우 "시소ㆍ미끄럼틀 등 없는 놀이터, 놀이방식 창조 가능한 공간이 더 중요"
서민우 "시소ㆍ미끄럼틀 등 없는 놀이터, 놀이방식 창조 가능한 공간이 더 중요"
"아이들에게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청년들에게는 스스로 공간을 운영을 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공유오피스, 중장년층에게는 '광장' 같은 박물관…각 세대별 생각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 사회는 학교, 직장, 집 아닌 '제3의 공간'이 없습니다. 유연한 공간이 많아지면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도 지금보다 활발해질 겁니다."(서민우·지정우 대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친구를 사귀고, 모르는 것도 알아가며 스스로의 규칙도 만든다. 협업과 창의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이미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교육에 익숙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창의적인 성과물을 낼 수 있을까. 때문에 놀이는 인권의 문제이자, 사회가 건강하게 자라나는 힘이다. 선진국이 '제대로 된 놀이터'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이유다.
한국에도 '어린이들이 잘 놀 수 있게 도와주겠다'면서 놀이터 짓기에 열중하는 건축가들이 있다. 놀이터 공공프로젝트로 알려진 서민우, 지정우 건축가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어린이 권리옹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의 놀이터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유명해졌다.
두 건축가들에게는 '아빠 건축가'라는 닉네임이 있다. 각자 아이를 키우면서 놀아줬던 경험을 살려 놀이터를 설계할 때도 최대한 아이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지정우 건축가는 "어린이들과 놀이터 워크숍을 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그는 "자라면서 경험한 기억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전문가의 시각을 더해 '지금까지 못했던 경험'을 만들어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다.
◆'놀이'에 '건축'을 더하다.
두 건축가가 처음 만든 놀이터는 지난해 8월 완공된 서울 동대문구 동답초등학교다. 일제 강점기와 권위주의 정부의 상징과도 같았던 구령대를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바꾼 점이 특징이다.
기존 구령대를 반 이상 잘라내고, 그 위에 '놀이집'을 얹어 구령대 자체가 놀이구조로 작동하도록 했다. 곳곳에 '나만의 공간'을 숨겨 재미를 더했고, 통로·경사로를 배치해 공간감과 운동량을 늘렸다. 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에게는 '구령대를 점령한 아이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도록 했다.
두 건축가는 "구령대 설계에 앞서 3~6학년 학생 30명과 4주간 매주 워크숍을 열었다"면서 "공간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반영하고, 끊임없이 피드백하면서 천천히 조금씩 완성해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네·시소·미끄럼틀 등 놀이시설이 없는 놀이터를 경험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초반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일반적인 놀이터만 떠올렸다. 두 건축가들은 아이들에게 놀이기구 없이도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창문· 계단·벽·기둥·문 같은 기본 건축 요소로 만들어진 놀이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구령대 놀이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전체 조회가 사라지면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던 흉물 같던 구령대는 경사대·계단·트리하우스 등을 갖춘 입체적 구조물로 재탄생했다. 재료는 철제프레임·나무·그물 등을 사용했다. 시소 없이 오르내릴 수 있고, 미끄럼틀 없이 미끄러질 수 있으며, 철봉 없이 매달릴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이 됐다.
두 사람은 "선택받은 몇몇의 아이를 제외하고는 건축가들이 만든 집에서 자라본 경험이 없다"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놀이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학교·학원·집에서는 못 느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특정 활동만 할 수 있게 용도가 정해진 시설보다는 기본 건축구조로 만든 중성적인 공간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재미있게 놀 수 있다"면서 "새로운 방식의 놀이를 창조하고, 서로의 역할을 만들어가면서 사회성도 길러진다"고 강조했다.
파주의 해솔초등학교와 김포의 유현초등학교 놀이터에 담긴 디자인도 형태는 다르지만 철학은 같다. 정글짐·철봉·그네 같은 기존 놀이시설 대신 ‘인공 언덕’을 만들고 그 안을 그물망·사다리, 클라이밍 구조물로 채웠다. 두 건축가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짓이 놀이 자체가 되게 했다"고 말했다.
사실 아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기존 놀이터가 아닌 새로운 놀이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학교·지자체·학부모·시민단체·각 분야 전문가 등 다양한 이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두 건축가는 "기존 틀을 깨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면서 "학교와 학부모가 아무리 의지를 갖고 추진하려고 해도 지자체의 허가, 투자, 지역사회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추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아이를 적게 낳으면서 젊은 부모를 중심으로 더 좋은 환경에 대한 고민, 어떻게 놀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한 점은 다행"이라면서 "어린이 놀이 환경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건축가·조경가·놀이전문가·시민운동가 등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간을 만든다, 삶을 짓는다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는 건 그 공간의 사람들의 삶과 마주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유에스플러스(EUS+Architects) 건축사무소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 건축가가 먼저 사무실을 열고, 2년 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서 건축가가 합류했다. 사무실 이름에는 '좋은, 긍정적'이라는 뜻의 접두사 'EU(이유)'에 'Story(이야기)'를 더해 '좋은 스토리'를 담는 건축을 하겠다는 두 사람의 의지가 담겼다.
의뢰인들의 '삶 이야기'에 전문가의 노하우가 더해지면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이런 따뜻한 시선은 '놀이터'로 구체화됐지만 두 사람이 만든 주택에도, 청년들을 위한 오피스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길 박물관·교회·미술관 등에도 반영됐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서울 서대문구에 마련된 청년들의 공유오피스 공간이다. 서울시가 청년지원사업 일환으로 의뢰한 이 건물은 '무중력지대'라는 이름처럼 주변의 자연환경과 지역 특성을 고려해 설계됐다. '무중력지대 홍재'는 청년들의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홍제천과 인근 인왕시장인 지역사회와 교류할 수 있도록 실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이 뻗친 오피스 공간을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지 건축가는 "기존의 젊은 세대만의 폐쇄적인 청년공간이 아닌 다양한 세대와 지역 주민과 상생하는 모델을 공간적으로 제시하고 싶었다"면서 "벽과 벽으로 막히거나 구분되는 '실'이 아닌 계단과 원형으로 구별되고 통하는 공간으로 단층이지만, 입체적인 공간감을 제시해 청년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아직 완공되진 않았지만 강화군 우리마을 증축과 파주 헤이리 마을에 들어설 피규어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서 건축가는 "(우리마을 증축)시설에서 은퇴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전문시설을 만들고 있는데, 일반 노인들이 아닌 지적장애인이 사용할 시설이어서 더 고민이 깊다"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건축가의 책임과 함께 기존 시설과 얼마나 어우러지는지, 또 주변환경과는 어떻게 반응하는 공간을 만들지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중 장요한 건 시설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공간"이라면서 "완벽한 단독주택 같지 않더라도 여생 동안 수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닌 내 집안에서 아늑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피규어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서 건축가는 "피규어를 소장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때 그려지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전에 없던 전시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라면서 "전시물의 성격을 건축물에 반영하면서도, 공간에 머무는 방문객들이 풍경처럼 어우러져 다양하게 해석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두 건축가는 앞으로도 지금의 철학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서 건축가는 "건축가는 은퇴가 없는 직업이라, 나이를 먹고 경험이 더해질수록 더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죽을 때까지 놀이시설을 계속 발전시켜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 건축가는 "놀이터 프로젝트가 발전이 돼서 청년들의 공유오피스 프로젝트가 됐다"면서 "현재 중학생, 고등학생 등 청소년 세대의 놀이공간이 비었는데, 학교·독서실·학원 말고 그들을 위한 '제3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최종 목표는 세대별 생각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