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하이브리드角] 권오현의 ‘초격차’와 정치인 장관 8인의 '혁신'

2018-10-29 17:57


세계 정보기술(IT)산업의 ‘심장’인 미국 실리콘밸리 한가운데 스탠퍼드대학이 있다. 아름드리 야자수 사이로 중앙 잔디광장(오벌·oval)에 들어서면 저 멀리 스페인풍 캠퍼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캠퍼스 곳곳에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등 근대조각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고풍스러운 캠퍼스를 가득 채우는 건 단언컨대 ‘자유’다. 반바지 차림에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전 세계 젊은 인재들의 자유분방함이 넘쳐난다. 하버드대 같은 근엄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행자의 관광이 아닌 유학·연수생으로서의 스탠퍼드대 경험은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유에서 온다’는 확신을 들게 한다. 40여년 전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박사 과정으로 유학 온 한국 청년 권오현도 5년간 머물며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 반도체회사로 일군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66)의 평범하지만 창의적인 경영철학을 담은 책 ‘초격차’를 읽었다. 그 짐작이 맞았다.

1985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를 딴 뒤 바로 미국 삼성반도체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한 이후 권 회장은 삼성 반도체를 낳아 키웠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디램 개발에 성공한 그는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변신,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7년 삼성전자는 앞서 24년간 부동의 1위였던 미국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삼성은 병상에 누운 이건희 회장,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으로 인해 이른바 '총수 공백' 상황이었다. 이때 삼성을 사실상 이끈 이가 바로 권오현 회장이었다. 그는 지난해 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기술의 삼성’ 연구개발(R&D) 총사령관 격인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에 취임해 '초격차'를 구상했다.

3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영철학을 설파한 '초격차'에서 그는 삼성의 1등 전략만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서로 떨어져 다름을 뜻하는 격차(隔差)가 아닌 격(格)의 차이, 격차(格差)를 강조한다. 격차를 수준의 차이가 아닌 격의 차이로 보는 것이다. 초격차를 이루기 위해선 기업의 문화와 역량 전반의 격(格)이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권오현 회장은 그 격을 리더, 조직, 전략, 인재라는 4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초격차는 주로 기업 경영과 관련된 사례가 많지만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기업 등 사(私)조직뿐 아니라 정부를 포함한 공(公)조직에도 자극을 줄 만한 내용이 즐비하다. 특히 국회의원 출신 장관들은 초격차가 주는 ‘혁신=생존’이라는 화두를 잘 새겼으면 한다. 현 내각 구성원 중 현역 국회의원은 7명이다. 유은혜(교육부)·김부겸(행정안전부)·도종환(문체부)·김현미(국토부)·김영춘(해수부)·이개호(농림부)·진선미(여성가족부) 장관이다. 홍종학 전 의원(중소벤처부)까지 합치면 8명, 18개 부처 중 무려 44.4%에 해당한다.

정치인 출신 장관을 거론하는 이유는 관료, 학자 출신과 달리 정치인의 결단력, 승부 근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공무원 조직을 제대로 장악하기 위해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 장관 8명이 떠오른 건 권 회장과 어느 젊은 재벌 후계자의 만남 부분에서다. 권 회장은 자신을 찾아온 그 재벌 후계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회사를 혁신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개선하기를 원합니까?” 그 후계자는 “저는 그냥 생존을 원합니다”라고 답했다. 국회의원 출신 장관들 역시 무사히 잘 마치고 지역구로 돌아가 국회로 ‘생환’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다. 8인 장관 중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2020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는 없었다. 권 회장은 그 후계자에게 이렇게 답한다. “생존을 원한다면 개선이 아니라 혁신해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선하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라고. 8인의 장관이 다시 국회로 생존, 귀환하려면 지금 맡고 있는 부처를 혁신해야 한다.

그 혁신의 핵심을 ‘사일로 파괴’라고 역설한 부분 역시 이들 장관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일로는 곡식 등을 저장하는 대형 탱크를 말한다. 이 책에서 사일로는 조직과 부서의 높은 장벽,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사일로에 있는 조직과 구성원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 특단의 대책은 사일로의 책임자를 서로 교차 배치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느 사일로로 배치될지 모를 정도로 극적인 로테이션을 시키면 사일로 간의 폐쇄적인 구조는 와해되고 소통이 시작된다. 사일로는 일종의 자신들만의 왕국이다. 행정 부처의 조직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정부 각 부처 사일로의 수장인 국장, 과장은 고독한 섬나라 왕국의 왕처럼 군림한다. 그 사일로를 뒤흔들고 섞는 것은 정치인 장관들의 의지에 달렸다.

이어 나오는 권 회장의 일갈은 무기력에 빠진 조직에 무시무시한 울림을 준다. “혁신으로 방향을 정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람을 교체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기존의 인력을 교육해서 혁신의 방향으로 내부 분위기를 전환시킨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을 그대로 존치시킨 채 혁신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혁신도 초격차도 없다. 말은 그만하고 결단의 행동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