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2000년 김정일이 놀란 '남북정상회담 깜짝편집'사건의 전말
2018-09-19 14:15
[편집의눈]오늘 문재인대통령-김정은 정상회담을 보도한 신문편집을 보는 감회
# 2018년 오늘의 신문
오늘자 아침 신문들의 편집을 들여다보는 감회가 여간 크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남북정상회담. 평양에서 열리는 건 세번째죠. 김대중.노무현 전대통령이 2000년과 2007년에 방북했고, 2018년 9월18일 문재인대통령이 마침내 평양 땅을 밟았습니다. 이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남북정상이 나란히 서서 카퍼레이드를 벌인 장면일 겁니다.
조간들은 놀랍게도 대부분이 똑같은 사진을 썼습니다. 차 오른쪽 VIP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오른 손을 들고 북한 군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고 그 왼쪽에는 김정은위원장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걸로 봐서, 문대통령이 김정은의 설명을 듣기 직전인듯 합니다.
이 사진은 구도도 좋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표정이 자연스럽고도 힘있게 살아있어, 역사적 사건을 담은 '명품'에 속하는 사진임에 틀림없습니다. 문대통령의 살짝 짙은 블루 정장 상의와 김위원장의 짙은 그레이 인민복 상의가 각각 오른손이 들려지면서 생긴 시원한 그림자들은, 평양 가을의 쨍한 햇살을 느끼게 합니다.
신문 편집자들은 저마다 고민을 했을 겁니다. 이 사진이 단연 좋은데, 가로 사진이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중앙일보처럼 가로 전체를 활용한 풀사이즈로 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조선과 동아일보는 기사 한단을 제외한 공간을 활용해 이 사진을 썼습니다. 이 크기는 전체를 쓴 중앙일보 베를리너 판형의 사이즈와 비슷합니다. 경제신문들을 볼까요? 한경이 동아와 비슷한 방식으로 레이아웃을 했습니다. 사진을 충분히 써주고 기사를 통단으로 처리했습니다. 매일경제는 사진을 한단 줄여 지면을 조금 더 알뜰하게 썼지만 전체 편집톤은 비슷합니다.
아주경제는, 딴 신문과는 다른 사진을 썼습니다. 이 신문은 문대통령이 손을 높이 들고 환호에 답례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썼습니다. 김정은은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고요. 이 사진을 쓴 까닭은, 세로사진인지라 좀더 크고 힘있게 쓸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이 사진을 가로 통으로 쓰는 것만으로는 뉴스의 의미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신문은 약속이나 한듯 신문을 가로로 눕혀, 전면에 사진 한장을 배치했습니다. 한겨레는 제호를 정상적인 위치에 놓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평양의 첫날, 파격의 하루>. 경향은 제목조차 사진 자체가 의미하는 풍성하고 생생한 '뉘앙스'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듯, 비교적 겸손한 작은 제목으로 '2018.9.18 평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문패를 달아줬습니다. 제호는 왼쪽 아래로 내려 평소의 4분의1쯤 되는 사이즈로 보일듯말듯 붙여놓았습니다. 사진을 충분히 감상하시라는 배려를 담고자 했을 겁니다.
# 2000년 그날의 신문
이런 사진을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의 언론인생 중에서 가장 빛났던 날. 2000년 6월13일.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그때였죠. 당시 정치부 전영기 기자는 이런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냉전을 녹인 6.14회담에선 이날자 중앙일보 신문이 화제로 올랐다. 오후 3시, 백화원 영빈관 회담장에 들어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5시20분쯤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때 회담장 바깥의 우리측 참모진이 서울에서 행낭으로 전달된 10여개 신문을 김대통령에게 건네줬다. 김대통령은 중앙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을 쭉 펼쳤다. 특히 1면에 광고없이 순안 비행장의 두 정상이 악수하는 사진을 전면 컬러로 게재한 신문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사진만 실은 신문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러자 김대통령 맞은 편에 서있던 김위원장이 궁금한듯 김대통령 쪽으로 돌아 걸어왔다. 중앙일보는 전날 저녁에 발행된 첫번째 판형(초판)부터 상봉장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1면에 전면사진을 배경으로 <2000년 6월13일/평양이 열렸다,뜨겁게 손잡았다,역사를 새로쓴다>는 검은 활자 제목과 첫상봉 장면을 간결하게 압축소개한 기사를 흰색글자로 처리한 파격적 1면을 제작했다. 초판에 이같은 편집을 한 신문은 중앙일보 뿐이었다.
김위원장이 손가락으로 펼쳐진 신문들을 가리키며 남한언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이자, 김대통령은 "이 신문들을 드리겠다"며 즉석에서 선물했다. 김위원장은 "고맙다"고 말한 뒤 수행원에게 "잘 챙겨두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 이후로, 6월14일자 중앙일보 1면 편집은 '김정일도 놀란 편집'이란 명성이 붙었죠. 김정일이 그날 챙긴 중앙일보 신문을, 북한이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 지면은 오랫동안 중앙일보 임원실 복도에 '중앙일보를 빛낸 지면'으로 붙어있기도 했습니다. 저 지면은 당시 중앙일보 편집부 1면팀장이던 저의 '출세작'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제 비슷한 고민을 안고 편집을 했을 많은 동료 후배들과 '공감'도 나눌 겸, 그때 상황을 좀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날 점심이 기억납니다. 당시 깐깐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노상훈 편집부장은 1면팀과 대구탕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역사적인 날이니까 네 멋대로 한번 편집을 해봐."라고 말했죠.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뉴스의 중압감이 엄청난데다 편집국 취재부서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기사들을 줄을 서 있는 상황. 거기에 1면 편집기자가 움치고 뛸 데가 어디 있을까. 팀원들은 부장의 말과 나의 표정 사이를 번갈아 보며 안쓰러워 했죠. 편집국으로 돌아와 사진부장으로부터 평양발 사진 2장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가로사진, 하나는 세로사진. 입맛대로 쓰라고 하면서 던져주더군요.
그날 1면에 잡혀있던 기사는 5건. 그리고 사진 2장.프린트한 기사와 사진을 책상 위에 얹어놓고, TV에서 몇번째 방영하고 있는 순안공항 남북정상의 악수사진을 보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감동적 장면 앞에서 천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인가? 사진 한장으로 그냥 가자!" 이렇게 마음은 굳혔는데, 이걸 설득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죠. 레이아웃 종이에 세로사진 한 장을 크게 붙여놓고, 사진 오른쪽 아래에 사진설명같은 기사 몇 줄과, 그 위에 제목 한줄을 달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선 아마 처음 시도한 이 편집이 통과하기 위해선 넘어야할 산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선 1면에 있던 3천만원 짜리 광고를 내려야 합니다. 이것은 경쟁지에 연락을 해보신 최철주 편집국장이 오케이를 했습니다. 그쪽도 광고 없는 1면으로 제작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정치,사회,경제부에서 쓴 기사 5건은?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더 어려운 대상은 사진부였죠. 사진 2장 중에, 뉴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담은 것은 가로사진이었습니다. 그걸 놔두고, 세로사진을 쓰겠다고 하니 바짓가랭이를 잡지 않을리 없습니다. 세로사진에는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 사이에, 인민군 병사 하나가 끼어있어서 약간 주의가 산만했죠. '정답'이 있는데 그걸 놔두고 굳이 오답을 키워서 쓰겠다는 편집자에게 영민하고 똑똑한 사진부장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습니다.
가장 험준한 벽은 편집국장이었습니다. 비교적 유연한 분이시기는 하나, 이 중요한 날, 기사를 하나도 쓰지 않고 사진 한장만 달랑 1면에 내보내겠다는 주장에 동조를 해주실까. 아니나 다를까, 1면팀장이 가져온 레이아웃 종이를 엄지와 검지로 툭툭 치며, 편집국장은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무 파격적이지 않나?"
이때, 흑기사가 등장했죠.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대담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며 열정적으로 이 편집을 밀어붙인 편집부장. 그가 없었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한번 이 친구 믿어보시죠." 노상훈부장의 확신범 같은 발언에, 편집국장이 빙긋이 웃으며 레이아웃지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까짓거 한번 해보자."
그날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이라는 1면 전면사진 편집이 등장했고, 이것은 뉴욕타임스에서 달착륙 때 한번 선 보인 바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지면이었죠. 그날 신문이 인쇄되어 나오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오후 6시 편집국의 많은 기자들이 처음 보는 신문을 받아 들었지만 사방은 마치 쥐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신문이 이래도 되나 하는 두려움이 말을 잊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편집국장 책상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예? 독자라고요? 아! 그래요? 아유, 감사합니다.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울시청 앞을 지나던 한 독자의 전화였죠. 신문을 본 뒤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면서 "사랑합니다, 중앙일보"라고 울먹이며 끊었다고 합니다. 이 전화 한통으로, 적막했던 편집국이 일시에 소란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이 대담한 편집을 축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디어오늘 이영환기자는 이 편집에 대해 이렇게 보도를 했습니다.
"남북정상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졌던 지난 13일. 각 신문사는 이날 발행되는 가판 1면의 편집을 놓고 비상이 걸렸다. 마침내 전체 일간지들이 가판을 쏟아내던 오후 6시께, 중앙일보는 언론계에는 물론 국민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1면 편집을 선보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바다 건너 일본까지 전해져 아사히신문은 다음날 신문에 이를 기사화했다.
화제의 1면을 편집한 편집부 이상국 기자는 올해로 편집경력 10년째가 된다. 이기자가 이날 이러한 편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늘의 뜻이었다. 편집부가 3교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원래 예정대로라면 12일 근무조가 맡아야 했던 일이었다."
이 기사는 제가 잊었던 일을 기억시켜주고 있네요. 사진부장이 "사진을 전면으로 확대하면 입자가 모두 깨져서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밀어붙여서 전면사진을 썼는데, 이번에는 사진파일이 너무 커서 전송이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죠. 그때까지 이만큼 큰 사진파일을 전송해본 적이 없었던 거죠. 외부에서 기술자가 와서 시스템을 재조정해서 겨우 시간을 맞춰 강판을 했습니다.
이 편집으로 7월21일 편집기자로서는 드물게 '전문보도 부문'이란 묘한 이름으로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죠. 편집기자가 기자협회상을 타는 일은, '사진 한장이 1면 전면을 차지하는 일'만큼이나 드문 일이라는 누군가의 농담을 듣기도 했던 때였습니다.
그때의 남북정상회담 주인공이었던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18년만에 다시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대담한 크기로 사진을 펼친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편집을 보면서 역사의 순환과 편집의 윤회를 느끼는 듯 합니다. 모쪼록 이번 회담이 성과를 거둬 남북이 진짜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을 앞당기기를 기원합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