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상봉] 국군포로·전시납북자 모두 사망…가족들 눈물의 상봉
2018-08-20 16:14
국군포로와 전시납북자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남북의 가족들이 이산가족 상봉길에 올랐다.
이날 상봉행사에서 조카를 만날 예정인 이재일(85)씨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형님의 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방북길에 올랐다.
이 씨는 방북 직전 취재진에게 "아버지는 늘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다가 사라져서 생사도 모르고 있는 게 한스럽다. 피난이라도 갈걸'이라며 후회했다"고 형님을 그리워 한 아버지를 회상했다.
이 씨는 1950년 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고향인 충북 청주까지 내려와 모내기 중 가족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가족들은 며칠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형님은 납치됐다. 당시 형님 나이는 18세.
납북된 형 이재억 씨가 1997년 사망해 대신 조카들을 이번에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씨는 형이 1950년 6∼7월께 18세의 나이로 납북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씨의 아버지는 형이 납북된 이후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다 1954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아버지가 형을 너무 그리워하며 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 기억이 더 많이 난다"며 "형님 납치 이후 그해 겨울에 가족들이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 씨의 가족은 형님이 납치되고 주변의 감시도 당했다고 한다.
이번 만남에서 진짜 조카들이 맞는지는 이야기와 느낌으로 알 수밖에 없다고 이 씨는 아쉬워했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이영부(76)씨는 아버지가 전시납북됐다.
아버지의 생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북에 형이 살아있다는 말을 고모에게 전해듣고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 조카들을 만나게 됐다.
이 씨는 "6·25 때 아버지와 함께 남한으로 와서 서울 혜화동에 거주하면서 아버지는 통장으로 일했다"며 "당시 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 오는 상황이었고, 인력이 부족해진 북 당국이 남한 사람들을 많이 납치해갔다"고 떠올렸다.
이씨는 "아버지가 1950년 9월27일 납북됐다. 당시 8만명이 납북되던 시기"라며 "북이 남쪽 사람들 신상을 파악해서 쓸만한 사람들을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인민군에 납치됐지만 북에선 자진납북이라고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납북될 당시 이씨는 초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어머니는 생활고로 30대 후반 이른 나이인 1962년 돌아가셨다고 이씨는 전했다.
최기호(83) 씨는 의용군으로 납북된 세 살 위 큰형 최영호 씨가 2002년 사망해 조카들과 대면했다.
최 씨는 "어머님이 끼니마다 꼭 형이 먹을 밥을 떠서 상에 올리고 '밥공기에 물이 맺히면 네 형은 살아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며 "밥이 뜨거우니 당연히 물방울이 맺히지. 잘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신 걸 그리 표현하신 것 같다"고 회고했다.
최 씨는 또 어린 시절 장난을 친다고 형에게 오줌을 누다가 미끄러진 일을 기억해내며 "형 성격이 참 순했다. 이렇게 조카라도 상봉이 돼서 감개가 무량하다"고 털어놨다.
이번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는 총 6가족의 상봉이 성사됐다.
남측은 상봉 행사를 준비하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50명을 선정해 북측에 생사확인을 의뢰했고 이 중 21명의 생사가 확인돼 6가족의 상봉이 성사 된 것이다.
앞서 최근 열린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진행된 상봉에서 남측은 350명의 국군포로와 납북자 생사를 북측에 의뢰해 112명이 확인됐고 이 중 54가족이 만났다.
북한은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