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영상톡]"99명 여인의 32년간 기다림"..'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코리아나화장품 본사에 걸린 날

2018-07-15 16:09
-유상옥 회장,유학수 사장,유승희 관장,유홍준 교수,홍선웅·박불똥·김정헌 작가,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이전 행사 참석


"그림이 오던 날 '아 왔다!'라고 방명록에 썼다. 왜냐하면 이 귀한 것이 30여 년간 잠들어 있다가 나한테 드디어 온 것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유상옥 회장(85)은 감격에 겨워 있었고, 32년 전 화장품 공장을 준공하고 '화장 문화'를 부흥시키려 했던, 혈기 넘쳤던 젊은 경영인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듯했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왼쪽)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12일 경기도 광교신도시에 있는 코리아나화장품 본사에서 벽화 형식의 대형 작품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이하 화장 미인도)를 1층 로비에 설치하는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는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을 비롯해 유학수 코리아나화장품 사장(58), 유승희 코리아나미술관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69·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홍선웅 작가(66), 박불똥 작가(62·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이사장), 김정헌 작가(72·4.16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1986년 제작된 화장 미인도는 가로 8.6m, 세로 1.9m의 초대형 크기로, 캔버스 안에는 99여 명의 사람과 53여 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32년 전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이 당시 라미화장품 대표이사였던 시절에 제작 의뢰를 했고, 유홍준 교수의 기획으로 김정헌·박불똥·홍선웅·김용태·이인철 등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청년 작가들이 제작했다.

당시 전문 경영인이었던 유상옥 회장은 2년 뒤 라미화장품을 그만두고 1988년 코리아나화장품을 창립해 독립했다.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앞에서 유학수 코리아나화장품 사장(맨 왼쪽부터), 홍선웅 작가, 김정헌 작가,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박불똥 작가, 유승희 코리아나미술관장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유승희 관장은 "당시 라미화장품은 동아제약의 계열사였다. 회장님이 그때 대표로 계셨고 라미를 적자 회사에서 흑자로 만들었다" 며 "이천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애정으로 또 이 작품(화장 미인도)까지 만들어 걸었다"고 회상했다.

화장 미인도가 걸렸던 라미화장품 공장은 이후 동아제약의 가그린 공장으로 바뀌었다.

유 관장은 "작품이 화장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제약회사 공장에 있는 것보다는 다시 화장품 회사에 와서 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 "유상옥 회장이 강신호 회장을 뵙고 말씀을 나누셨는데 흔쾌히 이전에 동의해 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 관장은 "코리아나화장품 본사는 일반인들도 화장품을 사러 많이 오는 곳이다. 이곳에서 화장하는 여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의의 있다" 며 "1986년도에 기업에서 커미션(제작 의뢰) 형식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 때인데, 의지를 갖고 제작하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를 만든 주역인 김정헌 작가(앞줄 맨 왼쪽부터),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홍선웅 작가(뒷줄 왼쪽부터), 박불똥 작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인도는 5명의 작가가 합동으로 그렸지만 이날 행사에는 홍선웅·박불똥·김정헌 작가만 참석했다. 김용태 작가는 작고했고 이인철 작가는 외국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 했다.

미인도의 제작은 유상옥 회장이 미국의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을 방문했을 때 시작됐다.

유 회장은 "기술제휴를 하기 위해서 찾아갔는데 응접실에 화장하는 여인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며 "그것을 사진 찍어 와서 한국과 매치시켜서 한국의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해서 유홍준 교수한테 부탁했다. 그분이 여러 작가를 모아서 그해 여름에 3개월간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유 회장은 이어 "그 당시에는 미용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화장 문화에 대한 것을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며 "이제 미술관이 있는 코리아나에서 찾아다가 전시해 놨기 때문에 한국의 벽화 발전에도 큰 획을 긋는 좋은 작품을 가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맨 왼쪽부터),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김정헌 작가가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에 담긴 사연을 얘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한국 현대 미술사의 한 획

99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가로 8.6m 크기의 화장 미인도는 캔버스에 유화로 바탕을 누렇게 칠한 후 동양과 서양의 화장하는 여인을 담은 작품의 일부 이미지를 차용해 콜라주(collage) 형식을 빌려 재현했다.

서지은 코리아나미술관 큐레이터는 "정확히 몇 작품이라고 파악이 어렵지만 적어도 동양과 서양의 8~9 작품이 섞여 있다"고 분석했다.

박불똥 작가는 이집트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 흉상의 이미지를 이용해 화장하는 여인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으며, 이인철 작가는 고개지의 '여사잠도'와 김홍도의 '결혼 행차도', 신윤복의 '미인도', '연당야유' 등의 작품 일부분을 차용했다.
김정헌 작가는 말과 낙타가 사막을 횡단하는 그림과 배 그림을 그렸으며, 홍선웅 작가는 아르 누보·바로크 시대 그림에서 가져온 이미지들 남겼다.
영역으로 구분하면 전체 작품을 크게 6개 부분으로 나눠서 왼쪽부터 박불똥, 이인철, 박불똥, 이인철, 홍선웅, 홍선웅 순으로 그렸다. 김정헌과 김용태 작가는 작품 상단의 일부 그림을 그렸다. 

[박불똥 작가가 그린 비너스]


참여했던 작가들은 당시에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청년들로 추상적인 그림을 비판하면서 걸개그림, 벽화 등 현실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행사 도중에 유상옥 회장은 참여했던 작가들에게 32년 전에 못 줬던 작품비를 나눠줬다.

서 큐레이터는 "물감을 산다든지 제작에 들어가는 실비는 지급했지만 그 당시에 회장님께서도 월급을 받는 대표이사 시절이어서 사비를 털어서 화장 미인도를 제작했다" 며 "후하게 사례를 못 해서 이번에 다시 작품을 가져오면서 그때 못 드렸던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사례를 드린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날 유상옥 회장은 작가들과 화장 미인도에 깃든 옛 추억을 감상하며 코리아나화장품 창립 30주년 기념일(2018년 11월 15일)을 준비하는 퍼즐을 풀어냈다.

유상옥 회장은 "3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남의 집에 그려놨던 것을 내 집으로 가져왔다. 그게 결국은 남의 집에서 그늘에 있던 것을 양지로 내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니까 '왔다'가 딱 맞죠!"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