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용을 품은 집' 포룡정과 김종필의 '제2p'정치학
2018-06-26 13:39
쿠데타 주역이자 정치거물인 그의 타계 뒤 서훈을 둘러싼 논란 곱씹기
# 부여의 용을 품은 집, 포룡정
26일 충남 부여 궁남지(宮南池)엔 연꽃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궁남지 한켠에서 김종필이란 이름을 볼 수 있다. 인공연못 한복판에 세운 정자의 현판글씨 '포룡정(抱龍亭)'이 그것이다. 글씨를 써서 달았던 때는 계축년 5월. 그러니까 1973년이다(정자는 197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는 3년째 국무총리를 맡고 있었고,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있었다. 총재는 물론 박정희 전대통령이다.
용을 품은 집, '포룡정'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용을 품었던 삶은 김종필 전총리의 정치역정을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1961년 육군본부 대령 신분으로 쿠데타의 주역이 되면서부터 2004년 4월19일 은퇴할 때까지 그는 발군의 킹메이커(용의 산파)였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4명의 대통령은 김종필의 메이킹 작업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은 조금 달랐다. 1980년 권력을 쟁탈한 신군부는 김종필을 부정축재자로 지목, 재산을 몰수하고 정치활동을 묶어버렸다. '셀프 킹메이킹'을 한 쿠데타 주역이던 전씨에겐 육사선배이자 정치선배인 김종필이 거추장스럽고 위험해보이는 존재였을 것이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출범시키면서 그는 다시 정치권에 복귀한다.
그전에도 위기는 있었다. 1968년 공화당의장이던 그는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놀라는 뭇시선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의반 타의반입니다." 권력투쟁에 밀린 그가 뱉은 이 한 마디는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권력자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고려를 거두지는 않지만 나름의 뱃심을 숨기지도 않는, 그 반반(半半)의 입장이 격동기 역사 속에서 오래 살아남게 했는지도 모른다.
# 서동과 김종필은 닮았다?
백제 위덕왕의 증손인 서동은 아이들의 입소문을 이용해 신라 진평왕의 둘째딸인 선화공주를 곤란하게 만들어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됐다는 '지략적인 남자'다. 포룡정은, 서동의 어머니가 궁남지(별궁이 있던 남쪽의 연못)에서 용을 본 뒤에 잉태를 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용은 무왕이 되었고, 그는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다.
이 대목에서 설화의 '이본(異本)'을 말하는 게 더 생생할지 모른다.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었고, 신라공주는 박-석-김 3성과만 결혼이 가능했다. 게다가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죽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때였다. 진흥왕은 진평왕의 아버지이고 성왕은 위덕왕의 아버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결혼하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서동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몰래 신라로 건너간다. 신라왕실의 승려초청 법회 때 선화공주와 눈을 마주치면서 불꽃 튀는 사랑이 시작된다. 서동과 선화는 짜고, 아이들에게 선화 염통 반쪽을 서동에게 떼어줬다는 노래를 부르게 한다.
신라와 백제가 통혼하는 애틋한 러브스토리지만, 거기엔 백제 무왕의 정치적 책략 또한 숨어있었다. 불가능한 결혼을 가능케 한 것은, 여론과 권력을 움직이는 그의 솜씨였다. 정치9단으로 일컬어지는 김종필과 비슷한 감각을 무왕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뭔가를 엮는 역량만큼은 닮은 듯 하다.
#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그는 중대한 고비에서 '역사'를 많이 엮어냈다. 오래도록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고, 다양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중심에 김종필이 있었다. 먼저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은 한일 수교이다. 196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일본 외무상과 마주앉아 메모를 작성하며 대일청구권 문제를 합의했다.
이때 그가 했던 말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는 발언이었다. 이때의 협정은 한일의 역사문제가 꼬이고 뒤엉키기 시작한 첫 실마리였다는 지적도 있어,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밖에 노태우 시절의 3당 합당이나 김대중 정권 때의 DJP 공조 또한 김종필이 개입한 '깜짝합의'의 작품들이다.
쿠데타 동지였던 박정희가 총을 맞고 돌아간 뒤에도 김종필은 정치적 장수를 누렸다. 전두환 때 잠깐 철퇴를 맞았지만 이내 되살아나 그후 오랫 동안 권력의 주변을 누볐다. 지역 감정을 타기도 하고, 다수당의 틈새에서 캐스팅 보트로 실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신 시절부터 최근까지 그의 대척점에 있었던 정치가들도 그를 받아들이고 이용하려 했다. 이뻐서가 아니라, 쓸모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 영원한 2인자, 第2p의 정치처세학
김종필은 유연한 처세가이지만, 군홧발(육사8기로 2016년 자랑스런 육사인상을 수상했다)의 기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를 왜 만들었느냐고 묻는 물음에 그는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나라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좀 무서운 곳도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만들었어요."
그런 처신이 때론 욕을 먹으면서도 줄기차게 약발이 먹혔던 건, 정치 인생 내내 지켰던 어떤 원칙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권좌에 오르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2인자로서 만족했다. 그의 이니셜인 JP는 '제2P(person)'로도 읽힌다.
유연성과 낮춤이 장기다. 굴욕과 곤경이 닥쳤을 때 행보는 느리고 담담했다. 소나기와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면의 폭풍이야 없었으랴. 김종필과 바둑을 둬본 사람은 말한다. "얼마나 사납고 무모한 바둑인지 몰라요. 사지(死地)에 들어와 이리 받고 저리 받으며 살아남으려 하는 거예요." 그 공격성이 나라를 뒤엎는 5.16을 가능케 한 건 아니었을까.
# 쇼팽 곡을 듣기 위해 350km를 달려간 남자
그의 정계은퇴일이 4월 19일인 건 아이러니였다. 민주주의를 개화시킨 4.19를 뒤엎은 쿠데타의 주역이, 바로 그날에 정치의 옷을 벗은 셈이니 묘하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누릴 것 다 누리고 돌아가는 자리였던지라 온전한 '정(正)'이라 하기는 머쓱하다.
김종필은 포룡정의 글씨 뿐 아니라 많은 곳에 현판과 족자를 남겼다. 청양의 장곡사 승방에도 그의 작품 현판이 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다양한 분야에 해박했으며, 서예는 특히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경매시장에서 3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고 한다. 아코디언과 만돌린을 연주하고, 마흔줄 넘어서는 서양화를 배워 수준급 경지를 이뤘다. 1960년대 미국에 체류할 때 보스턴심포니의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듣기 위해 350km를 달려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왠지 군인 출신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 정치인이면서도 여유와 해학이 있어보이는 까닭은 특유의 예향(藝香)과 문향 때문인지 모른다.
# 5.16기획도 '허업'이었는가
지난 23일 그가 타계한 뒤, 정부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하자 논란이 일고 있다. 군사쿠데타를 기획 주도한 사람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후세에 잘못된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사람의 공과 과를 따지고, 그 생의 의미나 가치와 서훈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은 이미 '역사'의 작업이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한 자주 말한 그는,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당위로 여길 것인가, 부끄럽게 여길 것인가. 포룡정을 비춘 궁남지 물살은 무심해 보인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