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권기옥③]상해전투에서 일본군 향해 기총소사
2018-05-16 17:33
# 중국 장군을 감동시킨 조선 여성의 발언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여성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주인공은 바로 조선의 여학생이며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입학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입학 당시, 운남성 독군(督軍,지방군 사령관) 당계요(唐繼堯) 장군과 대면한 이 낯선 조선여자가 서원(誓願)했던 말은 인구에 회자됐다.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행기를 몰고 일본으로 날아가 폭격하고자 비행학교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권기옥의 이 당찬 말에 입학을 주선해줬을까. 일제 하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는 중국인으로서 깊은 공명과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임엔 틀림없다.
# 암살자를 유인해 사살하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고 다가오는 민씨에 대한 정보를 누군가가 권기옥에게 먼저 알려줬다. 기옥은 몰래 빌린 총을 가슴에 품고, 긴히 전할 말이 있다는 청년을 데리고 학교 인근의 공동묘지로 유인한다. 이때 동기생인 이영무와 장지일을 멀찍이서 뒤따르게 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묘지 한쪽에 앉아 얘기를 꺼낼 듯 하다가 칼을 꺼내 공격하는 청년을 밀치고 기옥은 서슴없이 총을 쏘았다. 만약을 대비해 감시하고 있던 이영무와 장지일이 뛰어왔을 때 청년을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일본 영사관은 권기옥 사살령을 내렸다. 어디서든 이 여자를 만나면 죽이라는 지시였다. 그는 일본 경찰의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인, 학교 내에서 근신했다. 시시각각 죽음이 서성거리는 학교에서 그는 삶의 구원같은 '수업'에 매달렸다. 1925년 2월 28일,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그날이 왔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 권기옥. 그의 가슴엔 '윙' 배지가 달렸다.
# 풍옥상의 부대에서 날아오르다
그해 5월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비행기를 몰 자격은 생겼으나, 임정에선 그에게 그런 것을 사줄만한 재력이 없었다. 기옥의 가슴은 답답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면 무엇하나. 비행기가 없는 것을. 이듬해인 1926년 봄, 임정의 인사가 그에게 풍옥상의 항공대를 소개했다. 풍옥상은 북경에 있는 군벌이었다. 비교적 조선에 호의적인 그가 운영하는 비행부대에는 조선인 서왈보가 동로군 항공대장으로 있었다. 항공학교 졸업자인 권기옥은 자격과 실력을 인정받아 단숨에 항공대의 부비행원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5월21일자 동아일보와 1927년 8월28일자 중외일보는 권기옥에 대한 기사를 쓴다. '중국 창공을 정복한 꽃같은 여류용사, 조선의 붕익(鵬翼,위대한 날개)'이란 표현은 그때 나왔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기록된 안창남과 함께 거명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927년경 중국 국민혁명군의 손정방 군벌이 항공기를 접수해 상해에서 공군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권기옥은 달려갔다. 그는 중국공군의 비행원이 된다.
# 7000시간의 비행기록을 지닌 여성대위
초기엔 계급체계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중령에까지 올랐는데 이후 공군 개편 때 대위로 정해졌다. 권기옥은, 중국의 여성 군인을 비행기에 태우고 대륙을 일주하며 혁명의 기세를 돋우는 역할도 했다. 총 7000시간의 비행기록을 지닌 비행사였다.
1928년 5월 기옥은 남경에서 돌연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경찰이 그를 조선으로 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중국인 지인이 활약해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해, 권기옥에겐 삶의 반려자도 생겼다. 풍옥상 부대의 준장급 참모였던 5살 연상의 이상정(1896-1977)이었다. 32세 남자와 27세 여자의 독립투쟁 중의 결혼이었다. 이상정은 기옥과 동갑내기였던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1901-1943)의 형이기도 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중에서
# 독립투쟁 중의 결혼
1926년 월간 '개벽'에 발표한 이 시를, 2년 뒤에 형수인 권기옥도 읊조렸을까. 그는 가만히 '빼앗긴 하늘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바꿔 불렀을까.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듬해 상해 공격에 나섰다. 권기옥은 출격하여 지상의 일본군을 향해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한다. 항공학교 입학 때의 그 맹세를 제대로 실천한 셈이다. 이 전쟁이 확전되면 될수록 기옥에겐 희망이 보였다. 중국군이 일본군을 섬멸하면 자연히 조선도 독립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장개석총통은 만주를 일본 땅인 것을 확인해주는 대신 전쟁을 종료하는 협정을 맺고 만다.
# 마침내 일본 본토 상공 위에서 폭격을 할 기회가
1935년 특별한 기회가 왔다.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장개석의 후처로 손문의 처제) 여사가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당시 중국 청년들의 공군 입대를 장려하기 위해 여성비행사의 비행시범을 이벤트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코스는 상해-북경-화북-화남-동남아를 경유해 일본까지 비행하는 길이었다. 기옥은 마침내 일본 본토 상공 위로 날아가 폭격을 할 수 있는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 선전비행은, 북경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짐에 따라 취소된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