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칼럼] 지금 우리 경제에 두 개의 기(氣)가 필요하다
2018-05-15 04:00
- 사면초가에 빠진 기업·경제적 파이의 사각 지대에 놓인 청년들이 대상 -
남북 간의 장밋빛 이슈가 온통 도배를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경제에는 적신호가 도처에서 깜빡거리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호기를 시샘이라도 하듯 10년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든다. 1998년 아시아발(發) 금융위기-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2018 ? 시나리오다. 때마침 불어 닥치고 있는 신(新)3고도 우리 경제의 펀드멘탈을 위협하고 있다. 유가 상승·원화 강세·금리 인상이라는 복병이 수면 위로 불거져 나온다. 물가 불안과 수출 둔화로 경제 심리가 급격하게 얼어붙게 하는 악재들이다. 경제 펀드멘탈이 취약한 아르헨티나 등 일부 신흥국에서는 통화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압박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기승을 부린다. 유럽차가 타깃이긴 하지만 미국으로 수입되는 완성차에 대해 20%의 관세 폭탄을 물리겠다는 카드까지 만지작거린다. 만약 현실화된다면 자동차 수출 국가들의 미국 내 생산기지 이전이 불가피해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말 설상가상이다.
신흥국 경제는 휘청하는데 비해 미국·일본 등 선진국 경제는 일제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 두 나라는 경기 호조에 힘입어 실업률이 줄면서 완전고용 수준을 실현하고 있을 정도다. OECD 회원국의 평균 경기선행지수도 계속 호조를 보인다. 2016년 4월 바닥을 찍은 이후 최근까지 100.1∼100.2를 보이면서 상승세가 지속 중이다. 100 이상이면 향후 6∼9개월간의 경기 흐름이 상승세를 탈 것임을 의미한다. 반면 우리 경제의 선행지수는 5개월 연속 100 이하를 기록하면서 나 홀로 경기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질주하는데 한국만 역주행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정책 당국의 경제에 대한 대응 자세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나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작년 3% 성장률 달성도 우리가 잘해서라기보다 세계 경제의 회복세에 편승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금년 경제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마른 수건도 쥐어짜는 채비가 필요하다.
기업이 살아있어야 남북협력도 가능, 청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지금 우리 경제에 당장 시급한 것은 제조업의 추락을 여기서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실로 걷잡을 수 없는 미궁을 빠져들 수 있다. 지난 몇 차례의 글로벌 경제 위기의 한파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있는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제조업이 강하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적 붐을 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본질도 제조업 강국이 되는 경쟁임을 유념해야 한다. 보호무역이나 新3고의 파장을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더 강한 제조업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경제에 두 개의 기(氣)가 필요하다. 하나는 기업에 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더 이상 이들을 사면초가(四面楚歌)로 몰아붙여서는 우리 경제에 미래가 없다. 다른 하나는 청년들이 미래지향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 이들이 공직 취업에 안달하지 말고 기업(起業), 즉 창업이 미덕이 될 수 있도록 분위기 쇄신을 해야 한다.
눈을 돌려 밖을 쳐다보면 지구상에 잘 나가는 나라들은 대부분의 이 두 개의 氣에 방점을 찍고 있다. 성장 동력이 거기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먼저냐, 아니면 노동자가 먼저냐 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운명을 같이 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이다. 기업이 살아나야 노동자도 일할 맛이 나고 살아갈 맛도 난다. 젊은이들에게는 물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고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당근만 주는 것은 한계가 있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이 미래에 희망을 갖게 된다. 실패는 최대한 용인해 주면서 세계를 향해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혁신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남북 협력이 잘 되고 이를 통해 경제에 활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모두가 바란다. 그렇더라도 기업이 살아남아 경쟁력이 있어야 중국·미국·일본과 같이 이 판을 노리는 남에게 떡을 헌납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