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㉒] 환영받지 못한 임시정부 '난민'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
2018-04-23 18:17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의 그날 왔지만…
얄타에서 신탁통치가 논의되었다는 건 임시정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소련군 참전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때쯤이면, 충칭의 독립운동세력은 하나로 단합되어 있었다. 약산도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생각을 버렸다고, 수당은 기억한다. 그는 임정 군무부장으로서, 참전국 지위 획득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일을 처리했으며, 광복군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 노력했다.
수당 부부의 거처를 겸한 한국독립당 당사에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고, 일본이 언제 손을 드느냐, 이게 관심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조금만 더 버텨줘야 우리 손으로 해방의 문을 열 시공간이 열리는 거다. 성엄은 한독당-임정-광복군, 즉 당(黨)-정(政)-군(軍)에서 1인3역을 했다. 수당은 남편의 개인 비서 노릇까지 맡았다.
8월 3일은 수당의 마흔다섯번째 생일이었다. 중국 서쪽에는 회교도들이 꽤 많이 산다. 청진(淸眞)이라 불리는 회교도 식당에서 파는 쇠고기 요리가 교포들 입맛에 맞았다. 중국에서는 고기 하면 돼지고기라, 쇠고기는 값이 쌌다. 오랜만에 가까운 이들끼리 외식을 하며, 앞날을 논의했다. 사흘 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 “왜놈이 항복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항복의 백기를 올렸다. 그날 밤, 충칭은 광란에 가까운 축제의 열기로 불야성이 되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면 딱총을 터뜨리는 중국인들. 축제의 딱총소리는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왜놈이 항복했다!” 임정 식구들은 그날의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나라를 찾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수당은 대륙의 낯선 골짜기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항일 열사들을 생각했다. 그이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우리는 그이들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할까? 설레고 벅차오르는 감정이야 중국인들에 비할 수 없겠으나, 수당은 그들처럼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임시정부의 입지(立地)가 마음에 걸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조국 땅에서 왜놈들과 싸울 수 있었더라면. 광복군-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이 하나로 뭉쳐 압록강을 넘었더라면. 해방을 맞는 가슴이 이리 무거웠을까.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백범일지>) 백범이 땅을 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해방의 감격에 취해 있을 땐가. 동포들부터 수습해야 했다. 성엄은 선무(宣撫) 책임을 지고 상해로 먼저 갔고, 수당은 투차오로 돌아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임정 요인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소련군이 내려와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했다(8.24). 다음날에는 미국 정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고 발표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고국에서 들리는 소식은 하나같이 막막하고 답답했다. 미군정이 왜놈의 앞잡이들을 그대로 쓴다는 이야기에 울분이 복받쳤다. 미국은 충칭의 망명객들에게 지극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는 사이 두 달이 훌쩍 지나갔고, 10월 말 미 국무성은 “신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1946년 정초, 좌익계열 3당이 찬탁을 선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어왔다. 미국도 소련도 한반도를 손에서 놓지 않을 게다. 이리 되면 이념 갈등은 실력 행사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곧 귀국하게 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고 설레는 마음 한편으로, 암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1월 하순, 임정 식구 100여명은 버스 여섯 대에 나눠 타고, 상해로 출발했다. 대륙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긴 여로였다. 후난성에서 목선으로 갈아탔다. 피난길 때 몸을 실었던 배와 비슷한 크기였다. 창장(長江)을 따라 내려가며, 수당은 다시 한 번 먼저 간 넋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대신해 나라도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 한다.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상해에 닿은 게 2월 19일. 수당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얼마만에 입는 우리 옷인가. 동정을 여미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시아버지 동농의 묘 앞에 꿇어앉은 채, 수당과 성엄은 26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님, 당신의 손자 후동이가 보이십니까. 수당은 시아버지에게 다짐을 올렸다.
“아버님, 저희는 곧 고국에 발을 디딥니다. 아버님을 함께 모시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탓으로 우선 저희가 먼저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독립 조국의 하늘을 부끄러운 낯으로나마 대하게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곧 차비를 챙겨 아버님을 다시 뵙고 모시기로 하겠습니다.”(<장강일기> p263)
그러나 수당은 그 다짐을 다하지 못했다. 시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삼천리강토의 앞날을 지키려던 수당 부부의 뜻은 분단과 전쟁으로 꺾이고 말았다. 그것이 마지막 성묘가 되었으니, 송구한 마음을 어찌 표현하랴. 1946년 5월 9일. 임정 식구들은 상해 부두에서 한 많은 대륙 땅을 뒤로 하고 미해군 수송선에 올랐다. 미국정부가 그들에게 부여한 신분은, 그 이름도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난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