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⑥ 우리집에 가자, 폐교에게 속삭인 말

2018-04-09 18:42

겨우내 우리 아들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없어졌다. 폐교된 지 이태만에 불도저로 밀고 덤프트럭이 와서 학교를 실어갔다.

운동장엔 아직 민들레 한 포기도 비치지 않는 너무 이른 봄, 아이들은 벌써 이웃 학교로 떠난지 오래, 홀로 쓸쓸히 낡아가던 교문도, 교문 오르는 비탈길에 학교보다 100년은 더 된 느티 고목도 싹둑 베어지고 없다. 운동장엔 즐비하던 플라타너스 - 일찍이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커서 아이를 낳아 이 학교에 보내고, 운동회날 선생님 대접한다고 돼지 잡고 국 끓여 대낮부터 막걸리 콸콸 따러 동네잔치하던 그 플라타너스 짙은 그늘도, 그때 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꽃동산도 화산이 불을 뿜던 지층 파노라마도 축구골대도 둥근 시계탑도, 하얗게 빛나던 백엽상도 학교 교사 앞에서 구름이나 산새들을 불러 모으던 허리 굽은 적송 한 그루도, 아이들 깨금발로 오르내리며 놀던 돌계단도 밤낮으로 펄럭이던 태극기도 이젠 없다.

썰렁한 운동장엔 인근 숲에서 불어드는 드센 바람만 무성한데, 어린 플라타너스 잘린 몸뚱어리 몇 뒹굴고 있어 가만 들여다보니 수십 개의 둥근 별자리가 성성 박혀 있다.

나는 그 어린 등걸을 안고 지나는 바람이 듣지 못하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 얘야, 여긴 너무 쓸쓸해서 안 되겠다

우리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 / 배창환
 

[시골 폐교]




■ 시인은 쓸모 없고 바보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 건 바로 저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쓸모 없다. 생산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굳이 상처를 헤집어 기억을 들쑤실 건 뭔가. 신문사 편집국에는 ‘생산적인 기사’의 관점이 있다. 대안없는 비판은 꺼지라고 말한다. 뭔가 비판을 하려면 그 대안까지를 내놔야 진정 책임있는 언론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조지기만 하는 기사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런 언론관을 가진 사람들은 저 시에도 같은 얘기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폐교에 다시 학교를 지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학교가 없어도 사람들을 동원해서 운동회라도 벌여야 한다는 건가?

시인은 바보다, 하고 말할 때, 그건 저 이상한 횡설수설을 떠올리면 되리라. 아들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없어졌다는 첫 문장 속에 이미 뒤에 나오는 온갖 풍경들이 다 숨어 있다. 그런데 왜 구태여 그걸 말하느라 저렇게 긴 문장을 써대는가. 경제성, 효율성으로 보면 영 아니다.

시인은 저 비효율을 모른단 말인가. 시간이 남아돌고 할 일이 없으니 저렇게 한가한 몽상이나 즐기는 게 아니던가. 폐교에 가서 지난 시간들을 저토록 꼼꼼히 기억해내는 게 세상살이에 무슨 도움이 되던가. 거기다가 나중에는 정신병 기미까지 보이지 않는가. 어린 나무에게 다가가서 '우리집에 가자‘고 속삭인다. 어린 나무는 아이들이 아니다. 폐교의 허무와 공허감이 고양되어 하는 행동이라 하지만, 정상적인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말이다. 시인은 바로 저기에 빛나는 값어치가 있다. 시는 이 세상에서 소용없어진 게 아니라, 시를 발견하는 눈과 시에 감응하는 감관들이 무뎌진 것이다.

폐교는 학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양식이며 우리의 정신의 풍경이며 우리의 미래이며, 우리 마음 속에 안고 사는 어린 날의 모교(母校)이다. 우리의 모교는 나이가 들면서 폐교가 되어 있다.

학교 바깥에서 우린, 우리들의 어린 학교가 영원히 그 풍경 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키운 그 교육과 삶의 기초들이 불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린 마음 속에 폐교 몇 개 씩을 들여다 놓고 산다. 다만 그걸 곰곰이 들여다 보지 않을 뿐이다. 자라나는 나무 하나도 귀한, 그 불모의 풍경 속을, 시인은 잠깐 들여다 본다.

시인은 대책을 내놓은 사람은 아니지만, 상처를 아파할 줄 안다. 상처에 대한 감응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감각이다. 저 쓸모없음과 바보에게서, 우린 쓸모있는 것들과 겉똑똑이의 폐허를 본다. 정말, 이렇게 속삭이고 싶어진다.

얘야, 여긴 너무 쓸쓸해서 안 되겠다
우리집에 가자


제목은 ‘우리 집에 가자’이고 마지막 구절은 ‘우리집에 가자’이다. 조금 다르다. 제목의 ‘우리’는 나같은 독자를 포함한 제안이고, 시 속의 ‘우리집’은 공동경험을 가진 공동체의 공간이다. ‘나의 집’을 우린 저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내 아내’를 ‘우리 아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를 생각하면서 나와 너의 동행을 생각하는 게 바로 우리 표현의 '우리'다. 저 ‘우리집’에는 삶의 기반같은 것에 대한 정겨움과 자부심이 숨어있다. 우리집이 없다는 것, 그것이 폐교의 비극이다. 우리의 추억과 미래의 집이 없다는 것, 그것이 이 시가 드러내는 상처이다. 우리집에 가자. 여긴 너무 쓸쓸해서 안되겠다. 2018년 4월 9일 저녁.     빈섬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