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연습演習과 이욕離欲

2018-03-26 06:00
요가 수트라 I.12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시험(試驗)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2에서 요가를 “의식에 일어나는 소용돌이의 소멸”이라고 정의했다. 소멸이란 요가를 수련하는 자가 자신이 지닌 어떤 생각들을 불필요하다고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행위다. 그(녀)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오랫동안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수고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흠모하는 이기심에 근거한 쾌락을 강화할 뿐이다. 현재의 자신은 강화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현재는 더 나은 내 자신을 위한 발판이지, 내가 영원히 안주할 거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련자는 자신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여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몸으로 실천한다. 수련자에겐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근심, 걱정, 공포, 실망, 불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감정들을 유발하는 외부 환경들은 나를 수련시키는 조련사들이다. 인생의 역경은 오히려 내가 도달해야하는 목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움이다. 역경은 내가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할 문턱들이다.

필자는 이런 시험 앞에서, 오히려 두 발로 더욱 굳건히 서서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한다. 내 한 걸음은 목표점에 조금씩 가다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나의 최종 목표점이다. 나는 매일 목표점을 통과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지금) 실현된 종말(Realized Escatology)’다.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은 그냥 사라져버리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표점이 되는 ‘영원한 순간’이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험’을 통해 인간의 최선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금방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이 신과 같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발견하였다. 바로 ‘명성(名聲)’이다. 명성은 사후에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리더나 영웅들은 명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 시험들과 마주해 극복하면, 명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들을 보통 인간에서 영웅으로 탈바꿈하는 통과의례가 바로 ‘시험’이었다. 고대 그리스어 ‘페이라쪼(peirazo)’는 ‘시험을 치르다’란 의미다. ‘페이라쪼’는 ‘아테네와 같은 도시의 최고 관리를 뽑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을 시험하다’란 의미와 ‘올림픽 경기에 참가할 선수들을 선발하다’란 의미다. ‘시험’은 매일 매일 온전한 자신을 위해 요가수련하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수련자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역경이나 시험을 지혜롭게 대처하여 오히려 내가 가야할 길의 중요한 이정표로 삼을 것이다.

소멸(消滅)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은 과거에 안주(安住)하지 않는다. 안주는 성장과 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나를 도태시킨다. 요가는 수련하는 자에게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과거의 나를 버리는 행위가 미래의 나를 만드는 첫 발걸음이다. 수련자는 그런 과거를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나비가 자신이 태어난 고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아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비는 결코 자신이 떠나온 고치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현재의 나를 해칠 수 없다. 나는 이미 미래에 이루어질 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요가는 바로 이런 유기에 관한 수련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2에서 요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요가는 호수 바닥에 숨어있는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물결과 같은 생각을 ‘소멸(消滅)’하는 행위다.” 그는 이 생각들을 다시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정의하였다. 그런 후 이제 ‘소멸’을 정의한다. 우리가 어떻게 잡념들을 소멸시킬 수 있을까? 파탄잘리는 소멸에 필요한 두 가지 요소인 ‘연습(演習)’과 ‘이욕(離欲)’ 통해 설명을 시도한다. 연습과 침착은 요가 수련의 두 기둥이다. 여기서 ‘연습’이란 자신의 욕심을 극대화시키는 맹목적인 활동이 아니다. 자신이 달성해야할 참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해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인내다. 연습은 미래에 완성될 외부의 자아를 지금의 내부의 자아로 만드는 ‘내부화’의 과정이며 자신에게 감동적인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들여와 하나로 만들려는 ‘일치화’의 과정이다. ‘이욕’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타인의 기대나 인정을 삶의 기준으로 여겨 항상 요동치는 마음을 가다듬는 행위다. 외부로 향해있는 눈을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내부로 전환하는 노력이다. ‘이욕’이 없는 ‘연습’은 자화자찬에 빠져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맹목이 된다. 반대로 ‘연습’이 없는 ‘이욕’은 무딘 칼과 같아 자신에게나 세상에게나 무용지물이 된다. 파탄잘리는 요가의 목적인 소멸을 구성하는 두 요소를 이후에 자세히 소개한다.

파탄잘리의 설명은 허를 찌른다. 그는 ‘요가는 –이다’라가 아니라 ‘요가는 –이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요가는 인간의 머리에 들어가 있는 잡념들을 ‘소멸’하는 행위다. 요가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가 요가의 설명이다. 요가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군더더기 같은 생각을 가려 제거하는 행위 즉 ‘소멸’이다.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소멸을 구성하는 두 가지도 서로 상반된 두 개념, 즉 ‘연습’과 ‘이욕’이다. ‘연습’은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태도며, ‘이욕’은 반대로 그런 행위를 삼가는 태도다. 파탄잘리는 왜 두 개의 상반된 개념을 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시켰는가? 요가는 ‘연습’이다, 혹은 ‘요가는 이욕이다’라고 단언하지 않았는가? 요가는 ‘연습’과 ‘이욕’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중용(中庸)’이라 부른다.
 

영국화가 허버트 드레이퍼 (1863–1920) 유화 '이카루스 애도'. [사진=영국 테이트 미술관]


‘중용’과 이카루스의 ‘추락(墜落)’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부족과 과잉의 중간 지점, 즉 ‘중용’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라틴어로 ‘인 메디오 스타트 위르투스(In medio stat virtus)’ 즉 ‘덕은 중간에 위치한다’라고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들을 모두 중용을 통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용기’란 무모(無謀)와 비겁(卑怯)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나는 일상에서 그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수련한다. 나는 그 적당한 그 중간지점을 찾기 위해, 마음의 소용돌이를 고요하게 만든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중간지점을 ‘아름다움’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대칭(對稱), 비율(比率), 그리고 조화(造化)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감정인 사랑을 자아내며, 인간문명의 기초인 건축, 교육, 정치 등을 통해 장려되고 재생산된다.

중용을 찬양하는 가장 유명한 신화는 로마 시대 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8권 183-235에 등장한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추락(墜落)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훨씬 이전 기원전 2000년대, 크레타 문명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다이달로스는 무엇이나 만들 수 있는 발명가였다. 그는 크노소스에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를 위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정교한 구조물 ‘미로’를 건축했다. 그 안에는 크레타와 미노스를 위협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감금되어있다. 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로스는 미노타우로스와 그를 죽인 테세우스와 관련된 사건에 휘말려 미노스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높은 성안에 감금된다. 그들은 크레타섬을 도망칠 궁리를 한다. 다이달로스는 발명가답게, 새의 날개들을 밀랍으로 하나하나 붙여 커다란 날개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날개를 달고 크레타섬을 빠져나갈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지혜가 없고 성급한 아들 이카루스에게 경고한다. “아들아, 너는 중간 길을 유지해야한다(Inter utrum-que vola).”(<변신> 8권 206행) 이카로스가 바다에 가까이 붙어 날면, 습기가 날개를 무겁게 만들어 추락할 것이며, 태양 가까이 높이 날면, 햇빛이 밀랍을 녹이거나 날개들을 분리시켜 결국 추락할 것이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들고 날기 시작한다. 그들은 사모스, 델로스를 지났다. 그러나 그 순간 아키로스는 하늘로 높이 나는 행위가 즐거워 그만 태양가까이로 높이 올라간다. 그 순간 이카로스의 날개는 태양열에 녹아 산산이 떨어져 그만 바다로 추락하여 익사하고 만다. 다이달로스는 아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다급하게 외친다. “아카루스, 너는 어디 있느냐? 어디에서 내가 너를 찾을 수 있느냐?” 그는 이카로스의 날개를 파도위에서 발견하곤 울면서 자신의 기술을 한탄한다. 이 신화는 바로 중용에 관한 은유적인 가르침이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 I.12에서 요가의 목적인 소멸의 두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브야사-바이라그야-아브얌 탄-니로다((abhyāsa-vairāgyābhyāṁ tan- nirodhaḥ)” 이 문장을 직역하면 연습과 이욕, 이 두 가지를 유지하는 것이 요가의 상태를 유지하는 소멸이다. 파탄잘리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념인 열정적인 몰입으로 진행하는 생각의 ‘연습’과 냉정한 마음으로 헤아리는 생각의 ‘이욕’을 언급하지만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요가수트라> I.13-14에서 ‘연습’을, <요가수트라> I.15-16에서 ‘이욕’을 부연 설명한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설명하는 방식은, 수학적이다. 처음에는 전체 요강을 설명하고, 그 후에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을 차례로 소개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2에서 이 두 가지를 솜씨가 있게 유지하는 중용을 언급한다.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습니까? 동시에 당신은 무엇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려고 수련합니까? 당신은 무엇을 연습할지 혹은 무엇을 멀리할지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