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가상현실 소설⑧]남자현코드(namjahyun code)

2018-03-20 15:07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六十一

월간 잡지에 8.15 기획으로 ‘여자 안중근, 남자현을 아는가’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싣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마침 7월에 한 경북지역 신문에 ‘영양 지역 스토리텔링’으로 그를 다룬 바 있기에 이번에 한 작업은 보강취재였다.

영양군 생가와 사당 일대를 돌아보고 서울의 월곡동에 살고 있는 친손자 김시련선생, 또 상주에 살고 있는 친정 손자 남재각선생, 그리고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또다른 친손자 김시복선생과도 인터뷰를 했다. 워낙 자손이 귀한 집이라 그분들을 찾아낸 것만도 무척 다행한 일이지만, 사실 그들에게서도 기존의 성긴 자료 이외에 별로 추가할 만한 내용들을 취재해내지 못했다. 역사의 먹먹한 단절감같은 것이, 중언부언하는 기억들 너머에서 가물거렸다.

지난번 삼청감리교회에서 남자현을 만났을 때, 정작 중요한 것을 묻지 못했다. 어떻게 47세나 된 시골의 보통여인이 목숨을 걸고 만주에까지 뛰어들게 되었는가. 무장투쟁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카톡 대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생 대전환을 설명할 키워드는 무엇인가. 남자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일제에 목숨을 잃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하면 간명하긴 하다. 하지만 무려 23년이나 지난 뒤에 그런 결심을 한단 말인가? 3.1운동이 그녀를 각성시켰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한 시골여자를 총을 든 전사로 바꿀 전적인 계기로 보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점이 있다.

아이도 대강 다 키웠고, 이제는 인생에 못다한 미션을 할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것도 후세에서 편안히 앉아서 늘어놓는 풀이일 뿐이다. 아기를 다 키우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는 건 아니다. 3.1운동 직후 왜 영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로 갔는가. 그러나 질문을 받아줄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8월22일 새롭게 개통한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에 새 친구 하나가 등록됐다. 유란이라는 이름이었다.

# 유란

유란?

유란이 누구더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은 없었다. 잠깐 뒤에 메시지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절 기억하지요?”

“누구...”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잠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얘기에서 남자현의 남편 국오가 아내에게 주는 시에서 쓴 호칭이 아닌가! 나는 썼던 메시지를 다시 지우고 썼다.

“남자현선생이군요. 이번엔 연세가 어떻게...?”

이상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그녀의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정 사진’이었다.

아, 8월22일.

그녀가 하얼빈의 조선인 여관에서 눈을 감던 바로 그날이었다. 임종 직전 남자현선생과의 카카오톡 대화라... 하지만 그도 자판을 타이핑하는 하는 일이 쉽지 않은 듯 답신이 느렸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으면 지금 계신 그 서재를 방문해도 될지요.”
 
“지금요?...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0분쯤 뒤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조금 수척하지만 여전히 강해보이는 그녀가 들어왔다.

“여기 앉으시지요.”

의자를 내밀자 깊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천천히 앉았다. 감옥에서의 고통이 육신 속에 가득 배어있는 듯 했다. 그녀를 위해 차를 내오게 했다. 찻잔을 들면서 그녀는 나를 천천히 응시했다. 나 또한 61세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단단했다. 투쟁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얼굴이 평온하고 따뜻해보였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