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7] 갈단과 강희제 대결의 끝은? ③
2018-03-07 07:50
도시에서 테렐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이름다운 초원과 그 곳에 한가히 노니는 가축들 그리고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하얀 게르 등은 짧은 일정으로 몽골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유목국가 몽골 특유의 이미지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초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에델바이스를 비롯한 각종 야생화는 관광객의 눈길을 잡아 놓는다. 단순히 초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테렐지 근처서 마주친 준가르와 청
바얀 우란으로 향하던 청나라 서로군은 진군해 오는 동안 탈주병이 많이 생긴데다 일정도 예상보다 늦어져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직 풀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시기라 군마도 사람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즉시 전투대형을 갖출 것을 지시했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전진하던 서로군은 곧 종 모드에 이르렀다.
▶ 청, 종 모드지역으로 갈단군 유인
갈단은 청군이 먼저 산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것을 탈취하도록 병사들을 독려했다. 사격전과 포격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백병전을 펼치면서 종 모드 일대 들판은 사상자들로 뒤덮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 재기불능 상태로 패한 갈단
날이 어두워지자 청군의 한 무리는 현장을 빠져나와 갈단군을 왼쪽에서 공격하고 또 다른 한 무리는 갈단군의 후방에 있는 가축과 부녀자들을 습격했다. 갈단의 진영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자 산 위에 있던 청군이 총공세에 나섰다. 갈단과 부하 지휘관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휘부가 흔들리면서 갈단군의 진영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도망치던 갈단의 병사들 가운데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체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이 전투에서 갈단의 주력부대는 거의 전멸했고 갈단의 부인인 아누 카툰(왕비)도 전사했다. 갈단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거의 재기불능 상태의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강희제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측한 상황이 그대로 벌어진 것이었다.
▶ 평온한 과거의 격전장
3백여 년 전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현장은 너무도 평온했다. 근처 유목민에게 사온 마유주를 나눠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산과 산꼭대기까지 덮은 푸른 풀밭은 포근한 느낌을 안겨줘서 과거 치열했던 전장(戰場)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은 듯했다.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이 버스를 타고 몰려와 근처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이 전투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가 청나라 측에는 많은 반면 몽골 측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역사의 기록이 중국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점도 안타까워했다.
▶ 원정 성공 후 98일 만에 북경 귀환
갈단을 놓친 뒤 실망감 속에 귀로에 올랐던 강희제에게 청군의 승전보가 날아든 것은 전투가 있은 지 이틀 만이었다. 항복한 갈단의 부하를 심문해 승리를 확인한 강희제는 기쁨에 겨워 황태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황제의 본영 앞에 제단을 쌓고 3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하며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하늘에 감사를 올리고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했다.
▶ 서부 지역에서 방랑자 된 갈단
그 것은 갈단이 할하 장악을 위해 몽골 고원에 와 있는 동안 갈단에게 반기를 든 조카 체왕 랍탄이 준가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조카가 차지한 준가르 본거지
체왕 랍탄은 갈단의 형 셍게의 큰아들로 아버지가 암살되던 1,670년에는 7살의 어린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해준 숙부의 보호아래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숙부 갈단과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1,688년 할하를 공격해 투세에트 칸을 제압했던 갈단은 겨울이 되면서 새 본영지로 삼았던 알타이산맥 동쪽의 홉드로 돌아갔다.
다음해 갈단은 20대 중반에 들어선 조카가 라이벌이 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암살자가 게르를 습격했을 때 체왕 랍탄은 부재중이었고 대신 그의 동생이 살해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체왕 랍탄은 아버지 셍게의 옛 신하 7명과 함께 도주 길에 올랐다 갈단은 그들에 대한 추격에 나섰으나 그 쪽에 붙는 세력이 늘어나자 추격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
이후 체왕 랍탄은 준가르의 본거지인 일리지역 등을 차지한 것은 물론 갈단이 정복했던 타림분지까지 장악했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갈단은 준가르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몽골 고원에서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