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7] 갈단과 강희제 대결의 끝은? ③

2018-03-07 07:5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수도 근교의 관광지 테렐지

[사진 = 테렐지 숙박시설]

몽골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아마 국립공원 테렐지(Terelj National Park) 일 것이다. 테렐지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북쪽으로 50Km 남짓 떨어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방문할 수 있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이다.

도시에서 테렐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이름다운 초원과 그 곳에 한가히 노니는 가축들 그리고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하얀 게르 등은 짧은 일정으로 몽골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유목국가 몽골 특유의 이미지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초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에델바이스를 비롯한 각종 야생화는 관광객의 눈길을 잡아 놓는다. 단순히 초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 = 테렐지 게르 숙박촌]

적당한 구릉과 초원에서 만나기 힘든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앉아 초원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낸다. 또 가는 길에 마주치는 공룡 화석과 숲을 끼고 흐르는 툴강도 눈길을 끈다. 테렐지에는 울란바타르 호텔의 지점을 비롯한 숙박 시설이 들어서 있고 게르 숙소가 마련돼 있는 등 리조트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사진 = 테렐지근처 칭기스칸 테마공원]

여러 차례 테렐지를 방문했던 필자는 그 곳 숲 속에서 불을 피워 양고기 바비큐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미리 양념을 준비해 가면 노린내를 느끼지도 않고 양고기 맛을 즐길 수 있다.
 

[사진 = 관광객 말 타기]

또 말 타기는 이곳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여흥거리다. 주변 계곡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고 근처 울창한 숲은 가을철이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장관을 만들어 낸다.

▶ 테렐지 입구의 격전지 종 모드

[사진 = 종 모드 일대]

이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테렐지를 바로 옆에 두고 근세 몽골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갈단군과 청나라 군대의 결정적인 전투가 피비린내 나게 펼쳐졌다. 테렐지를 거의 눈앞에 둔 입구 쪽에서 좌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종 모드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사진 = 종 모드 지역 계곡]

그 곳은 넓고 완만한 계곡을 끼고 양편으로 산이 마치 구릉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사진 = 종 모드 전투도]

지금은 완만한 V(브이)자 형으로 된 아래쪽 계곡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소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서 있다. 바로 그 곳이 갈단군과 청나라군대가 격돌했던 결전장이었다.

▶ 테렐지 근처서 마주친 준가르와 청
바얀 우란으로 향하던 청나라 서로군은 진군해 오는 동안 탈주병이 많이 생긴데다 일정도 예상보다 늦어져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직 풀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시기라 군마도 사람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게 진군하며 테렐지 근처를 지나던 도중 앞서 가던 첨병으로부터 갈단의 군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갈단의 군대는 강희제의 중로군을 피해 서쪽으로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서로군을 이끌던 지휘관은 휘양구(費揚古)라는 무원대장군이었다.

그는 즉시 전투대형을 갖출 것을 지시했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전진하던 서로군은 곧 종 모드에 이르렀다.

▶ 청, 종 모드지역으로 갈단군 유인

[사진 = 종 모드 전투도]

휘양구는 병사들을 산 위에 포진시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한 뒤 선봉대를 갈단군이 있는 쪽으로 보냈다. 그들은 툴강 근처에서 갈단군과 한차례 전투를 벌인 뒤 달아나는 척하며 갈단군을 종 모드로 유인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전면전이 펼쳐졌다.

갈단은 청군이 먼저 산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것을 탈취하도록 병사들을 독려했다. 사격전과 포격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백병전을 펼치면서 종 모드 일대 들판은 사상자들로 뒤덮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 재기불능 상태로 패한 갈단
날이 어두워지자 청군의 한 무리는 현장을 빠져나와 갈단군을 왼쪽에서 공격하고 또 다른 한 무리는 갈단군의 후방에 있는 가축과 부녀자들을 습격했다. 갈단의 진영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자 산 위에 있던 청군이 총공세에 나섰다. 갈단과 부하 지휘관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휘부가 흔들리면서 갈단군의 진영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도망치던 갈단의 병사들 가운데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체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이 전투에서 갈단의 주력부대는 거의 전멸했고 갈단의 부인인 아누 카툰(왕비)도 전사했다. 갈단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거의 재기불능 상태의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강희제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측한 상황이 그대로 벌어진 것이었다.

▶ 평온한 과거의 격전장
3백여 년 전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현장은 너무도 평온했다. 근처 유목민에게 사온 마유주를 나눠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산과 산꼭대기까지 덮은 푸른 풀밭은 포근한 느낌을 안겨줘서 과거 치열했던 전장(戰場)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은 듯했다.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이 버스를 타고 몰려와 근처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사진 = 촐몬교수(몽골 사회과학 연구소)]

가이드인 몽골인이 종 모드의 역사적 사연을 일러주는 듯했다. 동행한 몽골 사회과학 연구소의 촐몬교수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몽골인이 숨져 갔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애석해 했다. 촐몬교수는 이곳의 전투는 몽골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전투중의 하나였다고 지적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몽골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도 결정지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전투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가 청나라 측에는 많은 반면 몽골 측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역사의 기록이 중국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점도 안타까워했다.

▶ 원정 성공 후 98일 만에 북경 귀환
갈단을 놓친 뒤 실망감 속에 귀로에 올랐던 강희제에게 청군의 승전보가 날아든 것은 전투가 있은 지 이틀 만이었다. 항복한 갈단의 부하를 심문해 승리를 확인한 강희제는 기쁨에 겨워 황태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황제의 본영 앞에 제단을 쌓고 3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하며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하늘에 감사를 올리고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했다.
 

[사진 = 강희제 행차]

많은 갈단의 부하들이 무리를 이끌고 청군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첫 번째 몽골 초원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낸 강희제는 98일 만에 북경으로 돌아갔다.

▶ 서부 지역에서 방랑자 된 갈단

[사진 = 몽골 서부초원의 양떼]

살아서 4-5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전투 현장을 빠져 나왔던 갈단은 어렵게 새로운 세력을 모아 5천여 명의 병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처음 할하군을 격파했던 항가이산맥 근처 타미르지역에 머물렀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인 준가르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 머물러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

그 것은 갈단이 할하 장악을 위해 몽골 고원에 와 있는 동안 갈단에게 반기를 든 조카 체왕 랍탄이 준가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조카가 차지한 준가르 본거지
체왕 랍탄은 갈단의 형 셍게의 큰아들로 아버지가 암살되던 1,670년에는 7살의 어린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해준 숙부의 보호아래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숙부 갈단과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1,688년 할하를 공격해 투세에트 칸을 제압했던 갈단은 겨울이 되면서 새 본영지로 삼았던 알타이산맥 동쪽의 홉드로 돌아갔다.

다음해 갈단은 20대 중반에 들어선 조카가 라이벌이 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암살자가 게르를 습격했을 때 체왕 랍탄은 부재중이었고 대신 그의 동생이 살해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체왕 랍탄은 아버지 셍게의 옛 신하 7명과 함께 도주 길에 올랐다 갈단은 그들에 대한 추격에 나섰으나 그 쪽에 붙는 세력이 늘어나자 추격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

이후 체왕 랍탄은 준가르의 본거지인 일리지역 등을 차지한 것은 물론 갈단이 정복했던 타림분지까지 장악했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갈단은 준가르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몽골 고원에서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