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4] 몽골의 지배, 무엇을 남겼나?
2018-01-26 08:39
6부도 통합돼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등으로 바뀌었다. 왕의 묘호(廟號)는 조(祖)나 종(宗)에서 왕으로 떨어졌다. 또 왕의 시호 앞에는 충자를 일괄적으로 붙이도록 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래서 임금의 명을 널리 선포한다는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바뀌었다. 왕실의 용어도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격이 낮춰진 말로 바뀌었다.
나라의 관제도 원나라의 관제와 충돌되지 않게 한 두 단계씩 낮춰 조정했다. 이와 함께 몽골 직제의 영향으로 생긴 관직도 적지 않았다. 몽골식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나 매를 잡는 일을 업무로 하는 응방(鷹坊), 몽골어를 배우게 하는 통문관(通文館)등이 그 것이었다. 또 공주를 따라와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겁령구(怯怜口)나 사속인(私屬人) 등은 관직 이상으로 힘을 행사했다.
13세기말 충렬왕 때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가요를 현대적인 해석으로 바꾼 것이다. 몽골지배 아래 있었던 당시 사회상을 풍자한 가요를 4연 가운데 1연만 소개했지만 전체 내용을 보면 당시 사회 각 계층의 문란한 성도덕을 풍자하고 있다.
▶ 고려 때 유입된 만두․소주․설렁탕
설렁탕과 만두, 소주 등이 이 시대에 들어 인기를 끈 음식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쌍화는 몽골의 만두를 일컫는다. 만두는 오래 전부터 몽골 유목민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이다. 몽골인들은 최대명절인 차강사르(설날)가 되면 여러 가지 만두를 만들어 먹고 손님을 대접한다. 찐만두인 ‘보브’와 군만두인 ‘호쇼르’, 그리고 물만두인 ‘반시’가 그것이다. 몽골인들은 평소에도 만두를 즐겨 먹는다. 몽골 최대의 명절인 나담 축제가 열리면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호쇼르는 불티가 나게 잘 팔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몽골인들이 고려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고려에는 만두점까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회아비는 이슬람인을 일컫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점이나 당시 사회상 등을 감안하면 몽골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요는 몽골의 지배와 함께 유목민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성적 개방 풍조가 고려에 만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몽골의 상인을 비롯한 외국의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영빈관(迎賓館) 등 외국인 전문 객관도 늘어나 바깥의 풍습이 적지 않게 고려로 흘러들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 족두리․연지 등도 몽골 풍습
몽골 지배 초기 충렬왕은 대도에서 생활하면서 익숙해진 몽골식 변발과 호복을 신하들에게 강요했다. 그는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맞이할 때도 신하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다. 그리고 변발을 하지 않은 신하는 환영식장에서 내쫓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몽골 출신 왕후와 그녀를 따라온 사속인들 그리고 고려에 머물고 있던 몽골 군인들이 몽골 풍습을 만연시켰다.
▶ 몽골 영향 가장 많았던 제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