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2] 제국의 붕괴, 막을 수 없었나?
2018-01-13 15:45
기황후를 중심으로 대륙에서의 마지막 몽골 대칸 토곤 테무르의 치세를 일부 살펴봤지만 그 것만으로는 전체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전반적인 상황을 짚어 보도록 하자. 크게 봐서 쿠빌라이 이후의 몽골제국은 안정성을 잃어 버렸다. 쿠빌라이의 사후 2-30년 동안은 그 시대의 탄력으로 견뎌왔지만 그 이후는 쿠데타가 끊이지 않는 혼란의 시대가 이어졌다.
토곤 테무르가 즉위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1-2년 사이로 대칸이 바뀌던 것과는 달리 토곤 테무르는 무려 3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권좌에 있었다. 그동안 쿠데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토곤 테무르는 항상 쿠데타의 두려움 속에 살았다. 권력을 장악한 강한 세력이 나타나면 그 세력이 자신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상대방을 먼저 제거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 톡토의 지정신정(至正新政)
톡토가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동안 혁신정치를 통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모순을 완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전 중국시대인 요나라와 금나라, 송나라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작업도 이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를 지정신정(至正新政)이라고 부른다.
▶ 천재지변 속 곳곳에서 반란
그 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군벌들의 지배아래 들어간 강남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이 바로 몽골 조정의 실력자 톡토였다. 여전히 몽골제국은 강남 지역을 제압할만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1,352년, 대군을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선 톡토는 백련교를 이끌던 교주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 처형하고 홍건적에게 타격을 가했다.
1354년, 톡토는 소주(蘇州) 지역을 중심으로 해운항로와 제염지(製鹽地)를 장악한 소금 상인 출신 장사성(張士誠)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톡토는 대군단을 편성해 장사성이 장악하고 있던 고우성(高郵城)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이 싸움은 몽골군의 승리가 확실했고 장사성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상황에 처했다.
▶ 쿠데타 의심에 톡토 제거 실수
톡토의 대군단이 장사성을 제압하고 강남으로 남하해 군벌 토벌에 나섰다면 아마도 주원장의 명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 몽골제국의 수명도 좀 더 연장됐을 것이다. 그런데 톡토가 이끌고 간 군단이 너무 거대했다. 토곤 테무르는 톡토가 칼끝을 몽골황실로 돌려 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마는 어사대에 지시해 갖가지 죄명을 날조해 가짜 성지(聖旨)와 독약이 든 사신을 보내 톡토를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 실권자인 톡토를 잃어버린 남벌군은 스스로 무너지면서 퇴각의 길에 올랐다. 이후 몽골은 소규모 전투로 대적하기는 했지만 곳곳에서 일어선 군벌들을 제대로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 톡토 제거, 원 멸망의 큰 원인
하마가 톡토를 모함해 죽이는 과정에 기왕후 모자를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톡토가 독살 당하기 2년 전인 1353년, 황태자 책봉 과정에서 책봉식이 미루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하마는 기왕후에게 당시 조정을 이끌고 있던 톡토의 반대 때문이라고 부추겼다. 이 때문에 기왕후는 톡토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 밀교에 빠져든 대칸
대칸을 여기에 빠져들도록 만든 간신은 하마와 하마의 매부인 투루 테무르(禿魯帖木兒)였다. 원사 혜종기(元史 惠宗紀)는 "하마와 투루테무르 등이 서천의 승려를 황제에게 은밀히 소개해 방중운기지술(房中運氣之術)을 행하였는데 황제는 이를 열심히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해 무너지고 있는 데 대칸이 밀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원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