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고양이와 나
2017-12-21 20:00
[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고양이와 나
나는 고양이가 싫었다. 고양이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날카롭다’, ‘요사스럽다’, ‘믿음이 안 간다’는 등 주로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 형상이 미학적이라는 느낌 외에는.
그런데 무섬에 살아보니, 이곳도 고양이 천국이었다. 40여 가구에 50여명의 주민이 상주하는 무섬 마을에 주민 수보다 많은 고양이가 살고 있다고 한다.
반면 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에 따르면 무섬 마을이 고택 민박촌으로 변하면서 개가 손님들에게 짖거나 달려들 것을 우려해 개를 기르지 않게 됐고, 고양이는 개체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이 야생 길고양이다. 이들은 참새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기도 하고, 가정집의 음식을 훔치거나 음식 쓰레기를 찾아 먹는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고양이의 존재를 무시하고 지내려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고양이들에겐 자기 영역이 따로 있는데, 해우당을 출입처로 삼아 들락거리는 고양이는 새까만 고양이 가족 세 마리와, 다른 고양이 두 마리다. 이들은 음식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라도 덤벼든다. 쓰레기 봉투를 발기발기 찢어놓는가 하면, 개방형인 정지(부엌) 싱크대에 수시로 올라가 발자국을 남기고, 식당으로 사용 중인 방의 문을 잠시라도 열어놓으면 어느새 들어와 뒤진다.
손님들이 와서 대청에 상을 차리고, 특히 마당에서 고기라도 구울라치면 출입 고양이 외에 다른 고양이까지 대청 마루 밑으로 잠입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사람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한눈을 팔면 순식간에 고기나 생선을 낚아채 달아난다. 나는 고양이에게 적대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다 고양이와 나 사이에 혁명이 일어난 건 지난겨울이었다. 몹시도 추웠던 날 저녁,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을 때고 방에 들어갔던 나는 불이 잘 살아나는지 보려고 아궁이 쪽으로 나왔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부뚜막 위,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 옆에서 새까만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웅크리고 추위를 면하고 있었다.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크기가 주먹만 했고 내가 다가가는데도 달아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영주 시내로 나가 어린 고양이용 사료를 샀다. 생전 처음이었다. 그 뒤 매일 아침 마당 한구석에 사료그릇을 내놓았다. 그리곤 방문을 살짝 열어놓고 문틈으로 관찰했는데,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들을 데리고 와서 먹이고는 마당의 양지 바른 곳에서 한참을 놀게 하다 함께 돌아가곤 했다.
고양이가 계란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어 한번은 계란을 쪄서 내놓고는 역시 방안에서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어미 고양이가 나타났는데, 계란을 맛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어미 고양이는 곧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는 먼저 새끼들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까만 고양이 가족은 사람 손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이라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해우당에 머물 때만 고양이 가족에게 먹이를 주고, 고양이 가족은 나에게 곁을 주지 않은 채 얻어먹기만 하는 관계가 지속됐다.
그렇게 봄·여름도 지난 어느날, 경비 아저씨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영주시에서는 무섬 마을에 문화재 경비 직원 4명을 파견하고 있는데, 이분들은 해우당에서 기거하며 교대로 근무한다). 노란색에 줄무늬, 몸집도 제법 있고 꼬리가 기다란게 자태가 우아했다. 관광객이 민박집에 버리고 갔단다. 고양이 사진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더니 아내와 두 딸이 이쁘다며 난리법석이다. 며칠 뒤 아내와 작은딸은 아예 고양이 집을 만들고 사료를 사서 무섬으로 내려왔다. 경비 아저씨가 붙여준 고양이 이름은 ‘콩이’. 나와 함께 살게 된 콩이는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우리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콩이는 고양이라기보다 강아지와 같았다. 먼저 다가와 몸을 비비는 등 애교도 많을뿐더러 “콩아~” 하고 부르면 언제나 “야옹~” 하고 대답을 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콩이 잘 잤니-”하고, 인사하고 콩이는 “야옹-”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우리의 하루가 시작했다.
사료그릇을 내놓으면 까만 고양이 가족도 나타나 입을 댄다. 한번은 몰래 지켜보자니 콩이와 까만 어미고양이가 그릇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몸집이 훨씬 작은 까만 어미 고양이가 앞발을 한번 휘두르니까 덩치 큰 콩이는 숙맥처럼 그대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야생과 애완용의 기질 차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서울에 갈 때면 경비 아저씨에게 사료 먹이기를 부탁하곤 했다. 그러나 서울에 가면 늘 불안했고 콩이의 안부가 궁금했다. 결국은 이별의 시간이 왔다. 한번은 서울에 갔다 오니 콩이가 보이질 않았다. 어떤 관광객 가족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콩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시로 떠나는 주인, 언제 올지 믿을 수 없는 주인에게 기대어 살기보다는 새 주인을 선택했으리라. 콩이와의 생활은 짧았지만 그 추억은 나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건 편견일 수 있다고, 사람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