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아궁이 앞에서

2017-11-27 20:00

[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사진=김지영 동양대 초빙교수·전 경향신문 편집인]



아궁이 앞에서


무섬마을은 가까운 곳이다. 서울의 집에서 2백여 km, 도로가 막히지 않으면 3시간 안에 가고도 남는다.
그 옛날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무섬에서 가까운 문수역에 내리자면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완행 열차를 타고 끝도 없는 듯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러다 내려서는 다시, 차도 다니지 않는 비포장 시골길 시오리를 걷는다. 하루 해가 짧은 거리였다.
이제 무섬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교통편이 발달하고 도로사정이 좋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관광객이 북적거리고 차량이 붐비는 광경, 또 그로 인해 여러가지로 부박해진 마을 분위기를 보면 내가 어딘가 멀리 떠나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적막하기만 했던 옛날의 산골 강마을 무섬은 언제나 ‘아득히 먼 곳’이었는데.
그런 가운데 지금도 무섬에 있으면서, 멀리 떠나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여름, 안대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대청에 앉아 온 천지에 가득한 벌레소리·새소리를 들을 때. 문득 새벽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서서 사방에 자욱한 물안개에 불빛들이 번지는 것을 볼 때. 관광객도 뜸한 깊은 가을밤, 내성천 모래밭을 걸으며 깜깜한 하늘에 보석처럼 박힌 달과 별을 볼 때. 또 그럴려치면 맑은 찬 바람이 불어와 내 뺨을 스칠 때. 흰 눈이 온 마을을 덮고 기와집·초가집 굴뚝에서 장작 때는 연기가 피어오를 때··
그리고 무엇보다, 거처하는 사랑방에 군불을 때기 위해 아궁이 앞에 앉아 있을 때 나는 혼자 한없이 멀리 떠나와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무가 타는 냄새는 근본적으로 비인공적이며 비도시적이다. 그것은 느릿느릿 잊어버렸던 옛 이야기와 원초적 향수를 불러온다. 비오는 날이면 나는 솔가지를 태운다. 솔가지 연기는 빗속에 낮게 드리워져 퍼지고 그 향내는 페부에 깊이 스며들어 온 몸의 세포들을 골고루 정화하는 듯하다. 나무타는 냄새는 나에게 서울과의 거리감을 한껏 떼어놓는다.
해우당의 난방 시스템은 장작을 때는 아궁이와 온돌이다(샤워를 하기 위한 욕실겸 화장실의 온수기 외에는). 무섬에서 난방시설로 아궁이·온돌만 쓰는 집은 우리집 뿐이다.
전통 민속관광촌으로서 이제 주민들의 주업이 숙박업처럼 돼버린 무섬 마을에서는, 자연히 집집마다 관광객들을 위한 부대시설, 즉 냉난방 시설과 조리대·수세식 화장실·샤워실 등을 갖추게 됐다. 설사 숙박업을 하지 않는 집이라 할지라도 아궁이와 온돌은 보일러 겸용으로 바꾸었다. 그만큼 산골 강마을의 한겨울 추위는 견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 집은 처음부터 민박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고 이 때문에 냉난방시설을 보완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유일한 조선시대 난방체제로 남았다. “의복이나 이불도 지금처럼 따뜻하지 않았던 옛적, 조상들은 도대체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월이 되면 벌써 새벽에는 춥기 때문에 아궁이에 장작을 때야한다. 난방시설이 빈약한 만큼, 나는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때는 습관이 생겼다. 불길은, 일단 큰 장작에 불이 붙을 정도만 되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가끔씩 새 장작을 넣어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나무 등걸을 놓고 앉아 이글거리는 불길로 가득찬 아궁이 안을 오래동안 마주 본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저 불은 과연 물질인가. 그보다는 물질이 소멸하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물질이 소멸하면 업장(業障)도 소멸할까.
아궁이속 불길에는 어느새 지나온 시간동안 내가 한 일들이 시간의 순서에 관계없이 어리며 하나의 그림처럼, 한 눈에 다 보인다.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까. 먼저 할 일을 나중에 하고, 나중에 할 일을 먼저 한 듯한 일들이 보인다. 중요한 일보다 가벼운 일에 집착했던 일도 숱하게 불길속에 떠오른다. 알고 저지른 잘못과 모르고 저지른 많은 잘못들도 그 옆에 병렬로 나타난다.
후회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미련도 부질없다. 성과위주의 속도전 속에서, 직업상 면하기 어려운 시시비비의 수렁에서, 이미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젠 거기에서 벗어나고 있기도 하다. 다르게 살기에 적당한 때가 오고 있다. 무엇을 간구할 것인가. 달려오느라 잘 챙기지 못했던 건 역시 내 영혼이다.
‘자유롭게, 그리고 너그럽게’
언제나 간절하게 원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이젠 낯선 느낌마저 드는 주제. 다시 마주 하고 싶다. 영적 세포를 쇄신하려면 ‘낯설게 하기’를 감수해야한다. 흔히 그러하듯 낯선 공간으로 떠나든, 낯선 자기 내면으로 떠나든.
해우당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을 때고 있노라면, 어느새 속계를 일탈해 외계에 온 듯 서울은 까마득하고, 나는 홀로 낯선 것을 도모한다. ‘더 자유로운 생각, 더 너그러운 마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큰 화두요, 큰 싸움이다. 겨울 참나무와 같은 ‘벌거벗은 힘’(알프레드 테니슨)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숫타니파타)는 정도의 각오부터 먼저 다져야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