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보는 세상] 지식재산권 국제재판부 설치를 환영하며

2017-12-12 17:37
특허법원 2016허7695

1. 들어가며

올해 6월 28일 특허법원에서 국내외 법조인과 지식재산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국 사법 역사상 최초로 실제 재판에서 영어로 변론이 진행된 것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3M이 한국의 특허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쌍방 대리인은 영어로 발명의 진보성이 인정되는지 여부에 관하여 열띤 공방을 벌였다. 재판부 역시 소송 진행과 관련된 주요내용을 영어로 요약하여 전달했으며 방청객에게는 영한·한영 동시통역이 제공되기도 했다.

애플,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유명 글로벌 기업의 지식재산권 담당자들 그리고 유럽상공회의소, 일본상공회의소 회원 기업이 재판을 방청해 한국 최초의 영어 변론에 대한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을 알 수 있었다.

2. 텍사스 동부 법원

한국에서 기념비적인 영어 변론이 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 9월 애플은 텍사스 동부 법원으로부터 4억3090만 달러(약 500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명령을 받았다. 애플이 아이폰 페이스타임과 아이메세지를 구현하면서 버넷엑스라는 회사의 특허를 도용한 혐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배상액이다. 1년 전 같은 법원의 배심원단은 애플에 3억240만 달러를 배상하도록 평결을 내렸는데 판사는 애플의 침해행위에 고의성이 인정된다고 보고 더 높은 배상액을 물렸다.

이 사건으로 또 한 번 역사적인 판결의 주인공이 된 텍사스 동부 법원은 인구 2만명 정도의 우리나라로 치면 ‘군’ 정도 되는 텍사스 주 테일러 카운티(Taylor County)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법원은 세계 지식재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관할 중 하나다. 미국에서 제기되는 특허 소송의 약 40% 정도가 이곳 텍사스 동부 법원에 접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지만 통상 3~4년 이상 걸리는 특허소송을 1년 내에 끝내는 신속한 소송 진행, 판사들의 직무 이동이 거의 없고 특허에만 집중해 전문성이 높다는 점, 글로벌 기업을 위한 다양한 외국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 등이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특허 승소율이 80%가 넘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특허권자에게 우호적인 성향을 띄고 있어 특허권자들 그 중에서도 흔히 특허 트롤이라고도 불리우는 ‘NPE(Non Practice Entity)’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할 법원이 된 것이 비결이었다.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전통적으로 특허를 침해한 것으로 주장되는 제품이 판매되는 곳이면 어디든 특허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보고 특허소송의 관할을 광범위하게 인정해왔다.

이에 NPE들 사이에서는 조금 더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생각되는 관할지에 소송을 제기하는 이른바 ‘포럼 쇼핑(Forum Shopping)’이 성행하게 됐다.

화훼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던 텍사스 외딴 시골 마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허권자의 취향을 저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타일러 카운티는 특허소송을 하려는 글로벌 기업인들과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이 모여드는 특허소송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

아예 타일러 카운티에 본사나 지사를 내는 기업도 늘어났고, 지역에 거점을 둔 작은 법률사무소들은 세계적인 기업과 로펌의 파트너가 됐다. 또한 숙박업, 부동산업 등 연관산업도 함께 성장해 지역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무엇보다 전 세계 기업과 지식재산권 종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특허에 관한 수많은 판결들을 쏟아 낸 텍사스 동부 법원은 명실상부 지식재산권에 관한 오피니언 리더가 됐다.

3. 세계 특허 법률 시장의 가치

2011년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애플과 삼성 간의 세기의 특허전쟁은 9개국에서 50여건의 소송을 거쳤으며 6년이 지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 과정에서 양사 간에 수조원에 이르는 법률비용을 지출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특허 분쟁은 그 자체로 거대한 빅마켓이다. 그 직접적 경제 가치만으로도 20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에 고용창출, 관련 산업 촉진 효과 등 보이지 않는 경제유발 효과를 감안하면 그 시장 규모가 300조원에 이른다.

비단 경제적인 효과뿐만 아니다. 세계질서가 IP(Intellectual Property)로 재편되는 지식산업시대에 국제특허분쟁의 관할권을 유치하는 것은 곧 미래 경제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글로벌 특허 분쟁의 HUB 국가가 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4. 동북아 IP-HUB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세계 특허 법률 시장은 그 동안 미국과 독일이 독차지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가장 주목해야 할 떠오르는 시장(Emerging Market) 이라면 단연 동북아 3국을 들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는 이른바 ‘IP5’로 불리우는 세계 IP 5대 강국 중 한국, 일본, 중국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특허법원이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IP 제도의 국제공조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지식재산산업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5년 연속 세계 특허출원 1위를 차지한 중국은 2014년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에 지식재산 전담 법원을 설치했으며 문화산권거래소, 브랜드거래소, 국제지식산권거래소 등을 통해 기술거래 규모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하이 자유무역 시험구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식재산 중심도시로 만들어 간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최고속도, 최고품질의 특허심사체제를 갖추고 특허무효율을 낮추기 위해 관련 법령과 시스템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북아 3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국제비즈니스의 허브국가로 자리매김한 싱가포르 역시 특유의 지리적 이점과 영어를 공영어로 사용하는 언어적인 강점을 바탕으로 세계지식재산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며 IP 허브 국가로 발돋움 할 준비를 하고 있다.

5. 한국의 성과 - 아시아 최초의 국제특허재판부 설치

우리나라도 IP HUB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힘찬 시동을 걸고 있다. 잘 구축된 전자 소송 인프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송비용, 공정하고 신속한 절차 진행 등 한국의 사법 시스템은 중국과 일본 등 경쟁국에 비교하여 분명한 강점이 있다.

반면, 정기적인 순환 근무에 따라 특허 분야에 숙련된 법관이 부족하고 특허가 무효되는 비율이 높으며 힘들게 침해를 인정받아도 배상액이 낮다는 점은 특허권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동안 꾸준히 관련 법령을 개정돼 왔다. 지식재산권에 관한 소송을 다루는 법원을 1심의 경우 5곳(서울 중앙·광주·대전·대구·부산), 2심은 특허법원 1곳으로 집중하도록 했다.

특허침해에 대해서는 영업비밀이라도 증거제출을 의무화하고 배상액 산정을 위해 법원이 전문 감정을 명하는 경우 당사자가 감정인에게 자료의 내용을 의무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또 심사청구 기간을 단축하고 직권재심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소송의 전문성을 높이고 특허권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나아가 IP HUB 국가로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식재산권에 관한 소송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나라에도 외국어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국제재판부가 설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지난 11월 27일 지식재산권에 관한 소송을 담당하는 법원의 경우 당사자의 동의와 법원의 허가를 받아 법정에서 외국어로 변론을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특정 재판부로 하여금 외국어 변론 사건을 전담해 처리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년부터는 한국 사법사상 최초로 지식재산권 국제재판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최초의 일로 향후 구성될 국제재판부는 영어를 법정언어로 사용할 수 있다. 영어로 변론을 하고 관련 서류와 증거도 영어로 제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통역과 영어판결문도 제공될 전망이다.

6. 이 사건 판결에 관해

앞서 소개한 특허법원에서 열린 영어 구술 변론 역시 향후 구성될 국제재판부 운영준비상황을 중간 점검하고, 적절한 운영 모델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행된 시범변론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8월 17일 이 사건 변론에 대한 판결이 선고됐다. 한국 최초로 영어 구술 변론을 실시한 재판부답게 영문판결문을 함께 제공한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그동안 특허법원은 국제재판부 신설을 대비하고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된 판결문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영문판결집, 영문 IP 저널 발간, 영문판결 DB 구축 등 번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실제 사건의 당사자에게 판결 선고와 함께 영문 판결문을 교부한 것 역시 한국 사법 역사상 처음 있는 뜻 깊은 사건이 아닌가 한다.

그 의의에 덧붙여 판결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본다. 이 사건 판결은 3M이 개발한 ‘고투과 광 제어 필름(Higher Transmission Light Control Film)’이 과연 특허로 등록될 만한 새로운 발명품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 필름을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에 부착하면 정면에서는 화면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측면에서는 화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주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는데 우리에게는 ‘보안필름’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제품이기도 하다.

원고 3M이 이 사건 필름을 출원하기에 앞서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2개의 선행특허가 등록돼 있었다는 점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이미 공개된 발명과 동일한 발명에 대해서는 특허 등록을 할 수 없다. 나아가 두 발명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차이가 있더라도, 그 차이점이 크지 않다면 새로운 발명으로 보기 어려워 특허 등록을 할 수 없다.

특허법에서는 발명이 속하는 기술 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선행 발명을 보고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발명이라면 그 발명은 특허출원을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특허법 제29조 제2항 참조). 이를 발명의 ‘진보성’ 요건이라고 부른다.

특허심판원은 3M이 개발한 이 사건 필름은 다른 발명자가 기존에 발명한 두 가지 선행발명 (이하 선행발명1, 선행발명 2)을 잘 결합하면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어서 진보성이 없기 때문에 특허등록을 받을 수 없다고 봤다. 출원자 3M은 이러한 특허심판원의 결정에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특허법원은 3M의 발명은 선행발명1과는 빛투과 영역과 흡수영역의 굴절율 차이값이 다르고, 선행발명 2와는 빛 차단 영역과 투과 영역이 이루는 접합면의 경사도 값이 각각 상이함을 인정했다.

나아가 이 두 가지 차이점은 서로 해결하고자 하는 기술적인 과제가 다르고 그 발생하는 효과도 상이하기 때문에 생긴 유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통상의 기술자 입장에서 살펴보아 선행발명1에 선행발명 2를 쉽게 결합해 발명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3M의 이 사건 발명에 대해 진보성이 인정된다고 보고 이와 배치되는 특허심판원의 결정을 취소했다.

보안필름의 작동원리는 기본적으로 빛을 차단하는 소재를 빛을 투과하는 소재와 교대로 배열해 화면을 측면에서 바라보면 빛을 차단하는 면이 빛을 투과하는 면을 가려 화면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보안필름의 경쟁력은 결국 높은 시선 차단 효과를 보이면서도 디스플레이 화면의 밝기나 해상도와 같은 품질에 는 손상이 없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투과영역과 흡수영역에 어떠한 소재를 사용할 것이며 어떻게 접합시키는지가 개발자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상의 기술자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서 비롯된 차이는 중요한 차이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로 생각된다.

7. 나가며

발명의 진보성에 관한 이 사건 판결의 내용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국제재판부 신설에 발맞춰 최초로 시도된 영어 재판의 결과로 빛을 보게 된 영문판결문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

한국은 세계 5위의 특허출원 국가다. 첨단 기술을 갖춘 글로벌 기업들이 포진하고 있고 수준 높은 과학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동북아 3국의 중심에 위치한 지정학적 강점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독특한 외교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만의 강점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수준으로 꾸준히 특허제도를 정비하고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법부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동북아 IP HUB 국가라는 꿈은 결코 꿈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 믿어 본다.

이제 곧 닻을 올릴 아시아 최초의 국제재판부의 탄생을 마음 깊이 환영하는 이유다.

[이정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