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9] 마르코 폴로는 大元제국에 갔었나? ②
2017-12-21 10:01
나머지 하나는 이집트의 항구 알렉산드리아에서 홍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넘어가는 해상통로였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 가운데 꼭 같지는 않지만 두 번째 통로와 비슷한 경로를 택했다. 흑해 통로는 당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이 제노바에게 사용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이용이 어려웠고 해로는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많다고 판단한 것 같다.
▶ 돌룬노르까지 3년 이상 걸려
타브리즈는 테헤란에서 북동쪽으로 6백 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코 폴로 일행은 발흐 지역으로 들어갔다. 발흐(Balkh)는 조르아스트교의 중심지인 고도로 아프간 전쟁 때 북부동맹과 탈레반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발흐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에 이르렀던 일행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오아시스도시인 카쉬미르와 호탄 등을 지나 하서(河西)지방, 즉 황하의 서쪽지방인 감주(甘州)에 도착해 1년간 머물렀다. 이 때 감주에서 머문 것은 마르코 폴로가 병에 걸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이들은 옛 서하 땅인 영하(寧夏)지역과 내몽골 지역을 지나 상도인 돌룬노르에 도착해 그 곳에 머물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나 알현했다. 베네치아를 떠나 돌룬노르에 도착하는 데는 3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17살의 마르코 폴로는 어느새 20살의 청년이 돼 있었다.
▶ "3년 동안 양주(揚州) 지방관"
"마르코폴로는 칸의 명을 받아 꼬박 3년 동안 얀주(양주)를 다스렸다. 주민들은 주로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에게 필요한 군장이 대량으로 제조되고 있었다. 이 도시의 주변에는 칸의 명에 따라 많은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몽골과 중국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양주의 관리 명부에서는 마르코 폴로 부자(父子)는 물론 어떤 외국인에 대한 언급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외국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남겨 놓은 여러 의문 중의 한 부분이다.
▶ 주로 사신이나 사절로 활약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로부터 '중요한 임무와 먼 곳으로의 임무를 부여받고 주로 사신이나 사절로 활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쿠빌라이가 단순한 사명에 대한 임무보다 여러 나라의 풍습과 신기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는 그 점을 간파하고 다른 사신들과는 달리 여행 중에 들은 온갖 희한하고 신기한 것에 대해 말해서 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북경에서 운남(雲南)까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얘기와 북경에서 복건(福建)으로 가는 길에 거친 여러 도시들의 얘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닌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정확함과 오류가 뒤섞인 언급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 그리고 자신이 투석기 제작을 건의해 이를 만드는 일을 관장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투석기 덕분으로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쿠빌라이는 이는 전적으로 폴로 가족 세 사람의 노고 덕분이라며 공을 치하한 것으로 돼 있다. 양양 번성작전을 마무리 지어 여문환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 것은 1273년 2월이다. 그런데 그 시기는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를 만나기도 전이었다. 그들이 쿠빌라이를 만났을 때는 이미 양양 번성의 모든 작전이 끝났을 때다.
▶ 해로를 통한 중동행 기회 맞아
마르코 폴로의 중국 땅 체류는 1291년에 마감된다. 1286년 당시 일한국의 네 번째 칸인 아르군은 부인인 불루칸(Bulughan)카툰이 죽자 그녀를 대신할 몽골 왕녀를 보내달라고 쿠빌라이에게 세 명의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 이때 보낸 사신 세 명의 이름은 중국 측 사료에도 나와 있다. 이에 쿠빌라이는 바야우트(Bayaut) 부족의 공주 코카친(Kokachin)을 선발한 뒤 사신을 딸려 육로를 통해 일한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당시 카이두와의 전쟁 때문에 중앙아시아 지역의 길이 막혀 되돌아오고 말았다. 마침 인도양을 다녀온 마르코 폴로의 얘기를 들은 몽골조정의 신하들이 해로를 이용해 일한국에 코카친을 데려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마르코 폴로에게 해왔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마르코 폴로 일행은 즉각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 일행에게 교황과 프랑스국왕, 스페인국왕, 기타 기독교권의 다른 국왕에 대한 사절임무도 함께 맡겨 일한국으로 떠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종족 간 전쟁으로 길이 막혔다는 것이나 상대적으로 어려운 해로를 선택한 것 모두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 2년 반 동안의 바다 여행
1291년 봄, 14척의 정크선이 천주를 출발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지나 말라카 해협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마트라 해안에서 역풍 때문에 5개월가량 지체해야만 했다. 이후 니코발제도와 안다만제도, 실론섬, 인도 서해안을 거쳐 26개월 동안의 대항해 끝에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Hormuz)에 도착하게 된다.
출발당시 6백여 명의 선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마르코 폴로를 포함해 18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일한국에 도착했을 때 아르군은 한참 전에 죽고 없었고 그의 동생 게이하투가 일한국의 다섯 번째 칸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일행은 코카친 공주를 아르군의 아들 가잔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후라산 지역까지 갔다. 가잔은 당시 후라산 총독을 맡고 있었다.
가잔은 정혼수계법(定婚收繼法: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정혼자를 부인으로 삼는 법)에 따라 코카친과 결혼했다. 공주를 무사히 넘겨주고 다시 수도 타브리즈로 돌아온 일행은 그 곳에서 9개월 정도 머물렀다. 일한국의 재상으로 역사서 집사를 썼던 라시드 웃 딘(Rashid-ad-Din)의 기록을 보면 가잔은 1293년 봄 테헤란 서북방 아브하르(Abhar)에서 대칸이 보낸 사신과 코카친 일행을 만나 그곳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