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9] 마르코 폴로는 大元제국에 갔었나? ②

2017-12-21 10:0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세 갈래 동방 접근의 길

[사진 = 동서양 세 갈래 통로]

당시 서유럽에서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대략 세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몽골의 유라시아 대륙 장악으로 동방으로 길이 열렸던 흑해 통로를 따라 들어가 중앙아시아와 초원로(草原路)를 거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해안도시 아크레(Acre)에서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Damascus),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그리고 아프간 지역을 지나 실크로드가운데 천산남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앗코(Akko)라고도 부르는 아크레는 베이루트 아래쪽에 있는 거점도시로 중동지역에 들어왔던 나폴레옹도 점령하지 못했던 곳이다.

나머지 하나는 이집트의 항구 알렉산드리아에서 홍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넘어가는 해상통로였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 가운데 꼭 같지는 않지만 두 번째 통로와 비슷한 경로를 택했다. 흑해 통로는 당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이 제노바에게 사용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이용이 어려웠고 해로는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많다고 판단한 것 같다.

▶ 돌룬노르까지 3년 이상 걸려

[사진 = 마르코 폴로 여행 경로]

마르코 폴로 일행이 베네치아를 출발한 것은 1271년으로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온 1295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기나긴 동방여행을 하게 된다. 이들은 터키를 지나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여기에서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거쳐 타브리즈(Tabriz)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몽골의 공략으로 폐허가 돼 버린 바그다드로 가지 않고 훌레구 울루스가 새로운 수도로 삼은 타브리즈를 거치게 된 것이다.

타브리즈는 테헤란에서 북동쪽으로 6백 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코 폴로 일행은 발흐 지역으로 들어갔다. 발흐(Balkh)는 조르아스트교의 중심지인 고도로 아프간 전쟁 때 북부동맹과 탈레반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발흐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에 이르렀던 일행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오아시스도시인 카쉬미르와 호탄 등을 지나 하서(河西)지방, 즉 황하의 서쪽지방인 감주(甘州)에 도착해 1년간 머물렀다. 이 때 감주에서 머문 것은 마르코 폴로가 병에 걸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이들은 옛 서하 땅인 영하(寧夏)지역과 내몽골 지역을 지나 상도인 돌룬노르에 도착해 그 곳에 머물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나 알현했다. 베네치아를 떠나 돌룬노르에 도착하는 데는 3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17살의 마르코 폴로는 어느새 20살의 청년이 돼 있었다.

▶ "3년 동안 양주(揚州) 지방관"

[사진 =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접견]

쿠빌라이는 마르코폴로를 근시(近侍: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시종)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후 마르코 폴로는 17년 동안 쿠빌라이 아래서 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가운데 1282년부터 1285년까지 양주의 지방관으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자신의 임무에 대해 밝힌 부분이다. 책을 대필한 루스티첼로(Rustichello)가 언급한 부분은 이렇다.

"마르코폴로는 칸의 명을 받아 꼬박 3년 동안 얀주(양주)를 다스렸다. 주민들은 주로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에게 필요한 군장이 대량으로 제조되고 있었다. 이 도시의 주변에는 칸의 명에 따라 많은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사진 = 중국 양주]

양주는 장강 하구의 무역항이다. 1951년 양주시 성벽을 허물다 발견된 대리석판에 ‘1342년 타계한 도미니코 일리오니스의 따님 카타리나가 이곳에 잠들다’라는 글이 발견됐다. 또 몇 년 뒤에는 ‘도미니코 일리오니스의 아들 안토니오가 1344년에 죽었다’는 글귀가 새겨진 석판도 발견됐다. 도미니코 일리오니스는 1348년 제노바 공증문서에 어떤 상인의 유언집행인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돼 적어도 마르코 폴로가 양주를 다스렸다는 시기보다 조금 후에 양주에 이탈리아 공동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갖게 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몽골과 중국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양주의 관리 명부에서는 마르코 폴로 부자(父子)는 물론 어떤 외국인에 대한 언급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외국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남겨 놓은 여러 의문 중의 한 부분이다.

▶ 주로 사신이나 사절로 활약

[사진 = 마르코 폴로 입국 경로]

마르코 폴로가 양주의 지방관은 지낸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접수한다 해도 나머지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애매모호하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로부터 '중요한 임무와 먼 곳으로의 임무를 부여받고 주로 사신이나 사절로 활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쿠빌라이가 단순한 사명에 대한 임무보다 여러 나라의 풍습과 신기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는 그 점을 간파하고 다른 사신들과는 달리 여행 중에 들은 온갖 희한하고 신기한 것에 대해 말해서 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북경에서 운남(雲南)까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얘기와 북경에서 복건(福建)으로 가는 길에 거친 여러 도시들의 얘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닌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정확함과 오류가 뒤섞인 언급

[사진 = 투석기]

그러나 각 지역에 대한 얘기에서 놀랄 정도의 정확함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오류가 뒤섞여 있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17년간에 걸쳐 중국 땅에 있는 동안 마르코 폴로는 분명히 아버지와 숙부와 함께 있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긴 얘기 속에 두 사람의 얘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단지 양양과 번성에 대한 남송 공격과 관련해 투석기 제작하는 과정에서만 이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이 또한 중국 측 사료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 그리고 자신이 투석기 제작을 건의해 이를 만드는 일을 관장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투석기 덕분으로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쿠빌라이는 이는 전적으로 폴로 가족 세 사람의 노고 덕분이라며 공을 치하한 것으로 돼 있다. 양양 번성작전을 마무리 지어 여문환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 것은 1273년 2월이다. 그런데 그 시기는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를 만나기도 전이었다. 그들이 쿠빌라이를 만났을 때는 이미 양양 번성의 모든 작전이 끝났을 때다.
 

[사진 = 칸으로부터 패자 받는 마르코 폴로]

투석기 제작을 건의했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더욱이 투석기는 이미 칭기스칸 시대부터 공성 작전에 효과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고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성에 대한 포위 공격 작전에 대한 언급이 정확한 것을 보면 누군가가 이에 대한 얘기를 전해줬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그 곳에 있지 않았다면 기술하기 어려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어 판단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 해로를 통한 중동행 기회 맞아
마르코 폴로의 중국 땅 체류는 1291년에 마감된다. 1286년 당시 일한국의 네 번째 칸인 아르군은 부인인 불루칸(Bulughan)카툰이 죽자 그녀를 대신할 몽골 왕녀를 보내달라고 쿠빌라이에게 세 명의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 이때 보낸 사신 세 명의 이름은 중국 측 사료에도 나와 있다. 이에 쿠빌라이는 바야우트(Bayaut) 부족의 공주 코카친(Kokachin)을 선발한 뒤 사신을 딸려 육로를 통해 일한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당시 카이두와의 전쟁 때문에 중앙아시아 지역의 길이 막혀 되돌아오고 말았다. 마침 인도양을 다녀온 마르코 폴로의 얘기를 들은 몽골조정의 신하들이 해로를 이용해 일한국에 코카친을 데려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마르코 폴로에게 해왔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마르코 폴로 일행은 즉각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 일행에게 교황과 프랑스국왕, 스페인국왕, 기타 기독교권의 다른 국왕에 대한 사절임무도 함께 맡겨 일한국으로 떠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종족 간 전쟁으로 길이 막혔다는 것이나 상대적으로 어려운 해로를 선택한 것 모두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 2년 반 동안의 바다 여행
1291년 봄, 14척의 정크선이 천주를 출발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지나 말라카 해협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마트라 해안에서 역풍 때문에 5개월가량 지체해야만 했다. 이후 니코발제도와 안다만제도, 실론섬, 인도 서해안을 거쳐 26개월 동안의 대항해 끝에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Hormuz)에 도착하게 된다.

출발당시 6백여 명의 선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마르코 폴로를 포함해 18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일한국에 도착했을 때 아르군은 한참 전에 죽고 없었고 그의 동생 게이하투가 일한국의 다섯 번째 칸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일행은 코카친 공주를 아르군의 아들 가잔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후라산 지역까지 갔다. 가잔은 당시 후라산 총독을 맡고 있었다.

가잔은 정혼수계법(定婚收繼法: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정혼자를 부인으로 삼는 법)에 따라 코카친과 결혼했다. 공주를 무사히 넘겨주고 다시 수도 타브리즈로 돌아온 일행은 그 곳에서 9개월 정도 머물렀다. 일한국의 재상으로 역사서 집사를 썼던 라시드 웃 딘(Rashid-ad-Din)의 기록을 보면 가잔은 1293년 봄 테헤란 서북방 아브하르(Abhar)에서 대칸이 보낸 사신과 코카친 일행을 만나 그곳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 = 마르코 폴로 귀환 경로]

다만 그 사신이 누구였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베네치아로 떠나면서 이들은 지중해 연안의 해안도시 아크레가 당시 이슬람인들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 쪽을 포기하고 대신 흑해지역의 중심도시 트레비존드(Trabizond)로 옮겨갔다. 트레비존드는 베네치아의 전진기지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당시 비잔틴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무사히 베네치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가 1295년으로 떠날 때 17살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어느 듯 40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