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드시 정벌’ 의지 약한 듯
제주에서 삼별초를 완전 제압하면서 42년간에 걸친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마무리됐다. 길고 긴 전쟁, 그것은 고려에게도 몽골에게도 지긋 지긋한 전쟁이었다. 세계를 무력으로 휩쓸었던 몽골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와의 전쟁에서 체면 구기는 일이 많았다. 우선 사신 저고여가 살해된 일도 그렇고 원정군 총사령관이 살해된 일도 그렇다. 특히 총사령관이 살해된 사례는 다른 곳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그럴 경우 몽골은 철저한 보복과 응징으로 그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고 초토화시키는 것이 통상의 순서였다. 몽골의 사절단을 죽인 호레즘의 오트라르성 성주 이날축은 귀에 끓는 은을 부어 죽이고 성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칭기스칸은 손자인 차가타이의 아들 무투겐이 전투 중 숨지자 샤리 골골라라는 아프간의 한 지역에 대해 살아있는 것은 동물까지도 모두 죽이는 잔인한 보복을 했다.
런데도 고려에 대해서는 마치 허물을 덮고 지나가는 것처럼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 타 지역 전쟁과 다른 양상
두 나라 사이의 긴 전쟁은 살펴본 대로 단지 ‘고려조정이 물을 사이에 둔 강화로 옮겨가서 해전에 약한 몽골군이 이를 정벌하지 못했다’라고 결론짓기는 아무래도 마땅치 않은 무엇인가 있는 것 같다. 금나라나 호레즘, 또는 남송을 공격하듯이 몽골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총력전으로 나섰다면 강화도 천도 여부에 관계없이 고려가 그렇게 오래 동안 견뎌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삼별초 제압을 위해 바다를 건너 진도와 제주를 장악한 과정을 봐도 마음만 먹었다면 고전은 했겠지만 시도 못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삼별초 제압 때는 고려군이 합세했지만 강화정벌을 위해 고려군의 역할을 중국의 한족들에게 맡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해온 몽골군의 지휘부의 격이나 군의 규모 등을 감안해보면 아무래도 고려를 반드시 정벌하겠다는 몽골의 의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몽골군을 끌고 내려온 장수들도 최고위급의 장수들이 아니고 군대의 규모도 들쭉날쭉해서 한 나라를 장악하기 위한 정벌군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전쟁 초기에는 서방 정벌, 그리고 후반에는 남송 정벌이라는 큰 과업을 앞에 두고 있어 병력을 분산시키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여왔던 양상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 장기전의 근본 이유는 ?
고려와의 전쟁이 장기전이 됐던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처음 한 두 번의 침공에서 전세가 결판났다면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벌을 마무리 지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조정은 섬에서 나오지 않고 있고 뭍에서 벌인 전투는 때마다 쉽지 않았다.
정규군뿐만 아니라 민중부대까지 나서서 펼치는 유격전에 몽골군은 번번이 고전을 하면서 지긋 지긋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돌아간 몽골군은 상층부에다 그들이 정벌을 마무리 짓지 못한 이유를 고려의 끈질긴 항전 때문이라고 보고했을 것이다. 그리면서 상층부에도 고려는 역시 정벌이 쉽지 않은 나라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됐을 수도 있다. 특히 총사령관까지 살해한 정벌 대상국이라면 통상의 몽골 행태로 볼 때 도저히 그냥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침공기세에 있어 약간의 강도 차이가 있었을 뿐 비슷한 형태의 몽골의 침공을 본격적인 정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고려에 대한 정서 작용 가능성
그 이면에는 고려에 대한 몽골인들의 인식과 정서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일부 학자들은 이것은 몽골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몽골과 한국을 하나로 인식하는 정서가 강하다는 지적이다. 태자 왕전이 쿠빌라이를 방문했을 때 쿠빌라이 크게 반기면서 보인 반응도 그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두 나라 전쟁이후에 원나라가 보인 고려에 대한 여러 조치와 대응 방법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몽골이 정복전쟁에 나선 이후 섬나라 일본과 베트남 등 먼 바다와 밀림 때문에 몽골이 이르지 못한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됐다. 정복된 나라 가운데 비록 부마국이기는 하지만 국체(國體)를 유지한 나라는 고려뿐이었다. 우리의 국사 책에도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됐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됐다.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원사(元史), 그중에서도 쿠빌라이시대를 이야기하는 세조기(世祖紀)를 보면 고려를 특별하게 대우한 여러 부분이 나온다. 쿠빌라이는 여진족이 고려를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군대로 하여금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고려에 대해서는 조유(詔諭: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황제가 친히 내리다)등의 말이 따라다닌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주기도 하고 고려의 술에 관해서는 세금을 면해주기도 했다는 기록도 원사 6권 세조기에 나온다.
1270년 원종이 원나라에 내조(來朝)했을 때, 쿠빌라이는 "경이 내조를 늦게 했으니 제왕(諸王: 칭기스칸 종친)들 보다 반열이 낮게 됐다. 이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일찍 내조했다면 원나라 종친들과 같거나 오히려 더 높은 지위를 줄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고려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원사에 등장할 정도로 고려에 대한 몽골의 관심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다른 나라와의 전쟁과 고려와의 전쟁에 접근하는 자세부터 달랐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공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것은 전투에 나선 몽골군에게 파괴와 약탈은 몸에 배어 있는 습성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몽골과 고려의 전쟁이 길게 이어진 이유를 고려에 대한 몽골의 정서적 측면에서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몽골의 간접 지배아래 놓인 고려는 이후 무려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몽골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역사의 마이너스 요인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