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의 음악이야기] 가수 정미조,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품격

2017-11-22 06:00

[사진=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선정위원]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After 40, every man gets the face he deserves)"라는 격언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긴 말로,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 마흔을 넘길 정도의 나이가 되면 긴 세월을 살아온 자신의 감정과 이력이 얼굴에 남아 그에 합당한 가치를 반영한다는 뜻이다. 이 표현을 예술가나 작가로 환원하면 '얼굴'은 '작품'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와 작품에 긴 세월의 가치를 담아낸 정미조의 신보를 들으며 든 생각이다.

지난해 3월 무려 37년 만에 가수로 복귀한 정미조에게 언론과 평단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72년 데뷔해 본래 자기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개여울'이라는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고 '휘파람을 부세요', '그리운 생각' 등 히트곡을 무수히 남겼으며 당대 최고 권위의 MBC '10대 가수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며 '원조 디바'라는 호칭까지 받았다. 13년간의 유학, 20여년의 대학강단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 대한 환영은 결코 오랜 예술가로서의 경력에 대한 그저 입에 발린 상찬이 아니었다.

트로트를 위시한 성인가요 일반이 마치 값싼 취미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작금의 젊은 취향 위주의 대중가요 시장에 정미조는 고즈넉한 어덜트 컨템퍼러리를 당당히 들고 오면서도 재즈, 탱고, 보사노바, 룸바, 라틴 리듬 등 일반 가요에 생소한 다양한 장르적 도구들을 훌륭한 연주자, 송라이터, 프로듀서들의 도움을 받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고풍스러운 음악이라는 이미지만이 아닌 음악성을 겸비한 장르음악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물론 고급음악으로서 스탠더드재즈 및 한국적인 스탠더드 팝에 대한 시도와 작업은 이전에도 있어 왔지만 정미조라는 가수의 여전하고도 완숙한 보컬이 단지 세련된 인상을 포장하는 형식적인 시도들을 아우르며 독립적인 그만의 작품성을 획득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정미조가 지난 17일 새로운 앨범을 또 내놓았다. 앨범의 방향성과 분위기는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즈, 탱고, 라틴 팝, 모던 포크 등 전과 같은 갖가지 장르 언어들이 높은 수준의 격조로 연주되고 그 위에 울림 짙은 정미조의 보컬이 얹어져 낯익고도 특별한 한국적 팝이 울려 퍼진다. 나일론 기타의 선연한 스트로크가 아름다웠던 '귀로'부터 반도네온의 처절한 독주가 매력적이었던 '인생은 아름다워(Feat. 고상지)'의 탱고까지 지난 앨범 초입의 드라마는 이번 앨범 타이틀 '젊은 날의 영혼'의 담백한 듯 처연한 건반의 서정과 박주원이 직접 작곡하고 연주한 라틴의 온기 등으로 재현된다.

하나 이것이 마냥 1년 전 방법론의 뻔한 답습인 것은 아니다. 지난 앨범 타이틀의 '37년'이 노래를 놓고 살았던 지난 공백의 시간에 대한 반추라면, 본 앨범의 '젊은 날의 영혼'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사유가 아닌, 그 시간으로의 선명한 회귀이자 그를 향한 명징한 초혼이다. 긴 세월 만에 복귀한 설렘과 들려주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던 그의 노래는 다소 차분히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정리하고 추가하게 되어서인지 두드러지는 악기의 전조가 노래의 전경을 이끌고 정미조의 감성 짙은 보컬이 마치 수채화의 채색처럼 뒤이은 감상을 완성했다.

손성제의 프로듀싱은 이번 앨범에서 한층 통일된 분위기와 유기적인 곡의 서사로 채워진 정수욱의 프로듀싱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노래에서 노래로 건너갈 때의 감정의 진폭은 덜하지만 하나의 앨범으로서의 집중력과 감상의 깊이는 더해졌다.

만남과 이별, 꿈과 그리움, 청춘과 순수함에 대한 응원과 그저 내려놓음이 한데 교차하는 '젊은 날의 영혼' 속 가사들은 올해 데뷔 45주년과 내년 고희를 연달아 맞이하는 정미조의 사려 깊은 세월의 관록을 느끼게 한다. 앨범 총 14곡 중 3곡에 처음으로 직접 송라이팅에 참여할 정도로 나름의 도전도 있었고, 몇 곡씩 나누어 미니앨범으로 내자는 제안을 '노래 속에 세월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담겨 있으니 한 앨범에 담고 싶다'는 고전적인 고집으로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농도 짙은 세파의 색과 뚜렷한 주관을 품었음에도 정미조의 보컬과 비브라토는 여전히 부드럽게 그리고 고아하게 노래를 감싸안을 따름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트렌드라는 미명 하에 단순한 시대적인 속성으로 대상의 미추나 위계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흘러가는 시절을 붙잡기 위해 어쭙잖게 현재의 것을 따라잡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미관을 호명하는 것과 반대로 지난 시대의 그것이 지나온 이의 태도나 품격에 따라 굳이 비참한 구태가 되지 않은 채 충분히 오늘날에도 빛나는 현재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정미조의 '젊은 날의 영혼'이 수십 년을 담아 이를 또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