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특집] '블랙리스트'가 유린한 문화예술계…상처 딛고 기지개 켤까
2017-11-17 06:00
'사드' 유탄 맞았던 콘텐츠·공연계도 숨통 트여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의 적폐들이 고구마줄기처럼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느 권력이든 문화예술을 탄압한다면 저항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촉구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계기로 300여 개 문화예술시민단체가 결성한 단체 '적폐청산과 문화민주주의를 위한 문화예술대책위원회'(문화예술대책위)는 지난 9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대응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이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은 "이명박 정권은 국정원을 내세워 문화예술인을 죽이기 위해 비열하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일들을 자행했다"며 "우리는 어느 정권하에서도 예술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문제가 있으면 연신 지적해왔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을 탄압하면 단호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블랙리스트' 상처 딛고 일어서기…지원 배제 예술인·단체 속속 복권
블랙리스트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은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던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의해서였다. 당시 문체부 소속의 익명 제보자는 도 의원실에 "청와대에서 처음 블랙리스트가 내려왔다.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혹시 몰라 사진을 찍어두었다"며 "이후 예술계에서 잡음이 많이 생겨 블랙리스트가 충실히 사용되고 있구나 알게 됐다"고 제보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더디긴 하지만 블랙리스트가 유린한 문화예술계엔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실행 기관으로 지목됐던 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 9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연극·무용·뮤지컬 등 총 5개 분야 22개 작품을 지원작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차민태 예술위 공연지원부장은 "창작산실이 올해로 10년을 맞는다. 올해는 지난해와 달리 심사방법에 변화를 줘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심사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을 지난해보다 2명 늘려 7명을 위촉했고, 각 분야 전문가 950여 명의 명단에서 추첨을 통해 선출한 심사위원들은 1차 서류심사와 2차 인터뷰 심사에 참여해 점수를 매겼다. 3차 쇼케이스 실연은 여기에 추가로 3명의 심사위원을 뽑아 총 5명이 심사했다. 50여 명의 관객평가단 점수를 10% 반영한 것도 이전과 다르다.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문화기본법 개정안, 일명 '연예인 블랙리스트 방지법'(대표발의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은 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 받지 않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문학계도 블랙리스트 굴레를 벗어나고 있다. 지난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스탄불국제도서전에 참가한 한국 작가 6명 중에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시인 안도현, 천양희, 소설가 김애란 등이 포함됐다. 특히 김애란은 문체부 지시를 받은 한국문학번역원에 의해 2015년 11월 미국 듀크대학에서 열린 북미 한국문학회의 초청 사업에서 배제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2015년부터 정부 눈 밖에 나면서 지원이 거의 끊긴 문예지 지원 사업도 재개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문체부는 5억 원의 국민체육진흥기금을 투입해 '우수문예지 발간지원 사업'을 2년여 만에 되살렸다. 내년엔 예전대로 10억 원의 지원예산이 편성돼 원상 복구될 예정이다. 작품 공모를 통해 1000만 원씩의 창작 지원금을 주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도 내년부터는 다시 10억 원(지난해 3억 원)으로 늘어난다.
출판계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는 모양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 7월 발표한 올 상반기 세종도서 790종에는 '윤이상 평전'과 세월호 참사를 다룬 책,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작가의 책들이 다수 포함됐다. 세종도서는 정부가 전국 공공도서관 등에 비치할 우수 도서를 선정해 종당 1000만 원 이내로 구매해주는 출판지원사업이다.
이와는 별개로,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화예술대책위는 지난 4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 신재민 전 문체부 차관을 고소 고발한다고 밝혔다. 문화예술대책위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문화예술인들은 권력에 아부하거나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당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을 파헤치는 사람들"이라며 "이번 고소 고발은 국민을 사찰하고 감시한 기록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철저하게 조사하길 바라는 뜻이며, 나아가 국가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닌 국민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사드 빙하기' 맞았던 공연계, 한중 관계 개선되며 숨통 트여
지난 8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중국 재공연 확정 소식이 알려졌다. 지난 9월 30일 중국 상하이 ET스페이스에서 라이선스 첫 공연을 올렸던 이 뮤지컬은 한·중 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긴장감 속에 재공연이 불투명했지만 본격적인 ‘사드 해빙기’를 맞으며 한숨을 돌리게 됐다.
그동안 한·중 관계를 가로 막아왔던 사드 갈등이 서서히 봉합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으로 발길을 끊었던 유커(중국인 관광객)가 다시 국내 주요 관광지를 방문하고 중국 공연단이 내한 무대를 진행하는 등 광범위하게 양국 교류가 정상화되고 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한국 대표 넌버벌 퍼포먼스(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무대 콘텐츠) ‘난타’는 오는 12월 충정로 전용 극장을 폐관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난타 전용관 4곳 중 중국인 단체 관광객 위주로 운영돼 온 충정로 극장은 중국인 관광객 급감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다.
난타 제작사인 PMC의 송승환 회장은 당시 “가장 어려운 때 20주년을 맞고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미국 하와이, 태국 파타야 등 새로운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중국 진출을 시도했던 아티스트들 역시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올해 초 벌어졌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소프라노 조수미의 중국 공연 취소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두 사람은 한국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가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소식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클래식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를 두고 “백건우는 2000년 9월 중국에서 공연을 위해 초청을 받은 첫 한국인 아티스트였다”며 “(이번 공연 취소는 사드에 따른) 지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 콘텐츠 수출액 증가…"장기적으로 긴밀한 관계 필요"
상황은 반전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재집권, 사드 추가배치에 관한 내용 등을 담은 한·중 양국의 3불 정책 합의 등으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최근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가 열린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리커창 중국 총리는 이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한국의 문화기술기업의 중국 시장 진출도 본격화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16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심천 심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17 중국하이테크페어’에서 문화기술 공동관을 운영하기로 했다.
김영철 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진흥부원장은 “중국하이테크페어 기간 동안 공동관을 운영해 국내 문화기술 기업이 중국 시장 및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며 “한-중 정상회담 등으로 ‘사드 해빙’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이번 행사가 열리게 돼 그 어느 때보다 성과에 대한 기대가 높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대감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2017년 2분기 콘텐츠산업 동향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국내 콘텐츠산업 매출액은 전년 동기대비 1.1조 원(4.4%) 증가한 25.7조 원을 기록했고, 수출액은 2억 달러 증가한 15.3억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5.4% 증가했다.
콘텐츠업계 관계자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물론이고 한·중 양국의 협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