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인공지능도 '창작'을 할 수 있을까
2017-11-07 06:00
"그날은 구름이 낮게 깔리고 어둠침침한 날이었다. 방 안은 항상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단정치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의미 없는 게임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말을 걸지 않는다. 따분하다. 따분해서 어쩔 수 없다."
단편 소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 의 첫 부분이다. 첫 문장만 읽었을 때는 북독일의 오래된 도시 뤼베크의 늦가을 저녁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저자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어느 독일 작가의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저자는 컴퓨터다. 이 소설은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주최하는 호시 신이치 공상과학(SF) 문학상의 공모전 1차 심사를 통과했다. 보도에 의하면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인공지능이 썼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논쟁이 이어진다. 이 소설은 ‘소설 쓰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엔지니어의 작품이지 컴퓨터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반대 의견도 있다.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사람이지만 스토리나 묘사까지 세밀하게 지시한 것은 아니라서 인공지능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미래지향적 의견도 있다. 소설, 작곡, 작사 등에 활용되는 인공지능의 수준이 계속 발전하고 있어 가까운 시간 안에 실제 창작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 질문 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반적인 창작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짓거나 표현함 또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일’. 이 문장 앞에 주어가 생략됐지만 우리 모두 주어가 사람 또는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사람 또는 인간은 실존적·생물학적 개인이다. 하나의 창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창작품 이전에 창작자를 먼저 알게 된다. 모든 창작품은 누구의 작품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의 창작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이후 창작품은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명예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창작을 창작자에 의한 창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생각해보면 창작의 정의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술 작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품의 저자도 중요하지만 내용도 중요하다. 때로는 내용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대중 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에게 저자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설 속 가상 세계에 몰입돼 대리 만족을 느끼고 때로는 자극적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많이 팔리는 소설이 좋은 소설인 경우도 있지만 황당한 내용인 경우도 많았다.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고유의 삶의 편린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 공상으로 가득 찬 내용도 많았다. 또 포르노 수준의 말초적 내용의 소설도 인기가 좋았다.
창작을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해진다. 작자가 아니라 작품이 중요해진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후 우리는 대중문화와 대중소비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술작품과 콘텐츠의 경계가 계속 희미해지고 있다. 물론 전통적 의미의 예술작품은 계속 존재하고 사회적 가치를 유지하겠지만, 작가 미상의 콘텐츠 역시 계속 유통되고 있고 인공지능에 의한 콘텐츠 역시 계속 나올 가능성이 크다. 특히 트렌디한 최신 노래의 경우 인공지능에 의한 작곡은 많이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짧게 나누어 편집할 수 있는 노래의 경우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이 더 경쟁력 있는 멜로디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훈련을 거쳐 나중에는 명품 클래식 곡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 또는 창작 역시 사회·역사적 산물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정의는 계속 바뀐다. 원래부터 예술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최초의 예술작품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예술과는 상관이 없다. 하루하루 야생 동물들과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는 원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림 속에는 사람이 동물보다 크고 용감하게 그려져 있다. 원시인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통해 힘을 얻는다.
사람에게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겠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많은 것이 좋다. 누구의 작품이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