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가는 것
2017-10-27 06:00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이런 말이 있다. "학문을 해본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쳐본 다음에야 어려움을 알게 되니, 부족한 줄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성장한다’ 한 것이다(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
우리에게 익숙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표현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어려운 글자 하나 없는 이 성어(成語)는 생각 외로 실천하기가 녹록지 않다. 수십년 교편을 잡은 이들 가운데 이 말의 의미를 되새겨 후학들에게 베푸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기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기회를 실현시킬 수 있는 키(key)는 교수자(敎授者)에게 달려 있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다라는 고정불변의 위치를 이미 마음으로 정해 놓은 순간, 그 기회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즉, 권위에 집착하면 교학상장은 사라진다는 뜻이다.
전통시대에는 늘 스승과 제자, 가르침과 배움의 담론이 일상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논의가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교권과 학생의 인권은 조화의 자리에 있다기보다 대치 선상에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빈번하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이 두 가지는 함께 상승해나갈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교권과 학생 인권을 양분하는 전제 자체가 너무 거칠지 않았는가 의심해볼 만하다. 이는 한 공간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할 양측의 가치를 동시에 훼손하는 경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은 초·중·고 교실이나 대학의 강의실에서 점점 질문이 사라지는 현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쏟아지는 지식정보에 학생들은 더 이상 교수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필요를 못 느낀다. 다시 말해, 가르침이 일방적이라면 그 방법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필자 역시 학교 안팎의 강의에서 많은 학생들을 만난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쉽고 후회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월이 입혀지며 그나마 깨닫게 된 바는, 내가 그들에게 어떤 지식을 전달하려 애쓰는 만큼 그들에게 내재된 다양한 생각과 감성의 편린들을 끄집어 내고자 애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필자 역시 상당한 자극과 가르침을 받는다.
공자 역시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하였다. 나이도, 지위도, 어느 분야에 입문(入門)한 선후도 따지지 않은 채 스스로 알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기탄 없이 묻고 배우고자 하였다. 학생일지라도 그들은 내가 아닌 ‘타인’이다. 내가 그들의 삶을 온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일방적인 전달보다 서로에 대해 배우는 일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의 말과 행동이 귀감으로 다가오고 그의 지식에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다면, 그는 나의 스승이 된다. 가르침에도, 배움에도 엽등(躐等)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잘 파악하는 일이 가장 첫 단계임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