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6] 구육은 어떻게 대칸이 됐나?
2017-11-06 14:49
오고타이 대칸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두 개의 결과를 가져온다. 대칸 구육의 등장과 자칫 역사 속에 묻힐 뻔 했던 툴루이가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가 그 것이다. 그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최대 관심사는 대칸 계승자
▶ 의외로 대칸 자리 차지한 구육
칭기스칸의 손자代에서 유력한 후보자를 몇 사람을 꼽을 수 있었다. 오고타이의 둘째 아들 쿠텐과 장자가문인 주치가의 바투, 막내 툴루이 가문의 뭉케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오고타이가 죽은 얼마 뒤 차가타이도 죽었고 그 아들 무투겐은 그에 앞서 죽어서 차가타이가는 후보자로 내세울 사람이 사실상 없었다. 이제 칭기스칸의 아들 모두가 사라진 상황에서 손자 대에서 누군가가 그 유업을 이어가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 유력 후보자는 모두 먼 곳에
▶ 오르도 지킨 투르게네의 역할
그래서 그 역할이 구육의 어머니 투르게네 카툰에게 넘겨졌다. 오고타의의 유해가 있는 오르도를 지킨다는 것은 새 대칸이 선출될 때까지 국사를 책임지는 섭정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육과 투르게네에게는 최상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이때부터 투르게네는 구육을 대칸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 바투의 방해로 대칸 장악 4년 걸려
무리한 이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쉽지 않아 무려 4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구육의 대칸 즉위에 가장 큰 방해꾼은 러시아 원정 중에 서로 다투면서 개인적인 원한까지 생겼던 바투였다. 바투는 모든 면에서 칭기스칸 손자代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아버지代가 모두 사라지면서 유럽 러시아 원정 결과 얻은 성과는 이미 모두 그의 것이 돼 있었다.
아버지 주치와 막내 숙부 툴루이의 좋은 관계를 알고 있는 데다 바투의 어머니와 뭉케의 어머니는 케레이트 공주 출신으로 이종사촌 자매간이었다. 그래서 바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쿠릴타이 소집을 지연시켰다. 그래도 투르게네가 쿠릴타이를 강행하자 아예 쿠릴타이에 불참해 버렸다.
▶ 구육의 불안한 출발
"몽골의 왕자들은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푼 채 황금 대좌에 앉은 구육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아홉 번 절함으로써 새 군주에게 충성을 표시했다."
대칸 즉위식을 지켜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카르피니는 그의 여행기를 통해 당시의 광경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전혀 고려에도 없었던 구육은 이렇게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출발부터 적지 않은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