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차이나 프리즘] 왜 만리장성은 베이징에 있을까

2017-10-19 12:17

[안치영 국립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정치학 박사)]

베이징(北京)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로 명과 청의 황성(皇城)인 자금성(紫禁城)과 서태후(西太后)의 환갑잔치를 위해 지은 여름궁궐 이화원(頤和園)이 있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수도인 황성에 자금성이나 여름 궁궐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황성의 바로 옆에 장성이 있는 것은 뭔가 개운치 않다. 만리장성은 이민족과 중국을 나누는, 그야말로 경계인 변경일 뿐만 아니라 적의 침공으로부터 ‘중화’를 지키기 위한 최일선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휴전선으로부터 불과 40km 남짓 떨어진 서울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우리 입장에서는 별일 아닐지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유목 민족의 말발굽에 짓밟힐 수 있는 적의 코앞에 천하의 주인인 천자(天子)의 황성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중국 통일 제국의 중심인 수도는 최초에는 시안(西安) 부근에 위치하다가 시대에 따라 동남쪽으로 이전했다. 뤄양(洛陽), 카이펑(開封)에 이어 남송시대에는 양쯔강(揚子江)의 이남인 지금의 항저우(杭州)인 린안(臨安)까지 남하한다. 북방 유목민족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남하하던 중화제국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북상하는 것은 원대(元代) 때부터다. 주지하다시피 원은 유목민족인 몽고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정복 왕조다. 유사 이래로 중국의 역사는 농경인 한족의 왕조와 북방의 유목민족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부분적 침투·융합의 역사였다.

원 제국은 그러한 과정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역사적 전환이었다. 원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이민족이 한족의 전 영역을 점령해 통치한 최초의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목과 농경을 통합한 대제국이 그 수도를 유목과 농경의 경계인 만리장성 변에 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난징(南京)에 도읍을 정했다.

이후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주원장의 사후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제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로부터 제위를 찬탈했다.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에 오른 주체는 자신의 본거지 베이징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만주에서 들어온 청조도 명대의 황궁을 계승한다. 청조의 멸망 후 군벌이 난립하는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를 평정한 장제스(蔣介石)는 국민정부를 난징에 수립했으나, 1949년 혁명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은 다시 베이징을 수도로 정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도가 반드시 지리적 중심이 있지 않을지라도 변경에 위치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수도가 만리장성 변의 변경 베이징에 위치하는 것은 베이징이 유목민족이 중국을 점령해 형성된 정복왕조의 중심이었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농경 세계를 정복한 정복왕조에게 장성은 더 이상 변경이 아니라, 농경 세계와 유목 세계를 아우르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원을 몰아낸 명과 청을 몰아낸 후 수립된 중화민국은 난징에 도읍을 했다. 그러나 명의 영락제(永樂帝)는 개인적 이유로, 마오쩌둥(毛澤東)은 난징이 관료자본의 수도라는 이유로 다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오랑캐를 몰아내고(胡虜驅逐)’ 수립된 한족 혹은 한족 중심의 제국이 수도를 다시 그들이 몰아낸 오랑캐의 수도로 되돌아 간 것은 영락제와 마오쩌둥의 의지의 결과만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지도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경으로 수도를 옮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복왕조는 단순한 이민족의 중국 정복이 아니라 이민족의 중국 정복을 통해 중국의 범위를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식의 측면에서도 재구성했다.

수도 베이징은 중국이 더 이상 농경 중국이 아니라, 유목 세계를 유목 중국으로 통합해 중국이 확장됐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중국의 확장은 중국이 팽창했다기보다는 유목민족의 중국 정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유목민족에 의해 정복된 중국이 유목민족을 중국화시키는 것은 어쩌면 아큐(阿Q)식의 정신승리법인도 모른다. 정신승리법에 의한 피정복에 의한 중국의 확장은 중국을 새롭게 만들어온 역사적 과정이었다.

근대 시기 중국을 구성하는 주체를 한족과 중국의 이민족인 소위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화는 근대의 발명인 것은 아니다. 비록 만주의 중국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화이(華夷)를 지리적 민족적 구분에서 문화적 구분으로 바꿔 농경과 유목을 하나의 ‘중화’로 규정한 것은 옹정제(雍正帝)였다. 유목 민족과 농경민족의 융합은 호한(胡漢)체제가 형성되는 남북조시대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누군가가 유목민족의 역사를 절반의 중국사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중국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이민족에 의해 침략당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청사(淸史)는 물론 거란의 요사(遼史), 여진의 금사(金史), 몽골의 원사(元史)까지를 모두 정사로 포함시켰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만리장성 변의 수도 베이징은 바로 유목과 농경의 통합과 함께 피정복을 통해 팽창됐던 중국의 역사와 중국인의 재구성을 지리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