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9] 수베타이는 몽골의 한니발인가? ②
2017-08-25 09:04
수베타이는 호레즘 전쟁과정에서 제베와 함께 특수임무를 부여 받게 된다.
도망친 호레즘의 왕 무하마드 샤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처단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를 생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그가 갔을 곳을 모두 뒤져 끝까지 쫓아가라. 가는 길에 방해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가차 없이 파괴하라."
▶ 병사로 전락한 칭기스칸 사위
이 과정에서 칭기스칸의 사위 토크차르가 제베에게 항복한 마을을 약탈했다.
전리품을 가로채는 것은 유목민에게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였다.
지휘관에서 일반 병사로 추락한 토크차르는 전투 중에 사망했다.
원칙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그의 가족일지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칭기스칸의 성격을 알게 해주는 사례다.
어디에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했던 무하마드는 결국 카스피해에 있는 아베스쿤이라는 작은 섬에 숨어들었다가 도주 중 얻은 폐병으로 숨지고 만다.
▶ 몽골과 러시아의 첫 만남
무하마드가 죽은 뒤에도 수베타이와 제베의 군대는 서쪽으로의 진군을 계속했다.
이들은 카프카즈산맥을 넘어 킵차크 초원지대로 들어섰다.
몽골군과 러시아와의 첫 격돌은 바로 흑해 연안의 초원지대 카프카즈에서 이루어졌다.
몽골의 저승사자군단은 아조프해로 흘러드는 칼카강변에서 킵차크인들을 잔인하게 정벌했다.
▶ 러시아 연대기에 기록된 몽골군
러시아의 연대기(러시아의 역사서)는 당시의 잔인한 몽골군의 행태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몽골군은 포로가 된 공후들과 대 귀족들을 묶어서 땅위에 눕히고 그 위에다 널빤지를 깐 다음 널빤지 위에서 술잔치를 벌였다. 그래서 널빤지 아래 깔린 사람들은 모두 질식해서 숨졌다."
칼카강의 전투가 있은 뒤 수베타이와 제베 군대는 남 러시아의 여러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한 뒤 볼가 강변의 도시 볼고그라드에서 볼가르인들을 격파했다.
그들은 우랄산맥의 캉클리 투르크인을 격파한 것을 끝으로 러시아에 엄청난 공포심을 안겨준 원정을 끝내고 시르다리아 북부초원으로 돌아가 칭기스칸 군대와 합류했다.
수베타이군은 10여 차례에 걸친 그 지역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수베타이는 몽골로 귀환했지만 제베는 도중에 열병이 걸려 몽골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 러시아에 심어준 공포
몽골과 러시아(당시의 이름은 루시)의 첫 만남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러시아 지역에는 무서운 재난과 엄청난 공포심을 안겨 줬다.
그 첫 만남에서 러시아 연대기에 기록된 타타르는 이후 러시아인들이 몽골인을 부르는 명칭이 됐다.
연대기의 작가가 이들을 왜 타타르라고 부르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어째든 몽골 유력 부족 중의 하나로 칭기스칸에 의해 존재가 사라진 타타르족의 이름이 외부에서 다시 되살아나 몽골을 부르는 이름의 통칭으로 굳어졌고 지금도 러시아는 몽골을 가리켜 타타르라고 부르고 있다.
러시아에 큰 공포심을 안겨준 수베타이는 나중에 결국 러시아 정벌을 그의 손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 對 서방정벌 맹활약
그리고 2년 뒤 셋째아들 오고타이가 두 번째 칸의 자리에 오른다.
수베타이의 진가는 오고타이칸 시대에 단행된 러시아와 유럽 원정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1236년 오고타이칸은 對서방 정벌군을 출진시킨다. 총사령관은 칭기스칸 가문의 장손격인 주치의 아들 바투가 맡았다.
그리고 부사령관은 수베타이가 맡았다. 여기에는 오고타이의 아들, 차가타이의 아들, 툴루이의 아들 등 칭기스칸 가문의 손자들이 포진했다.
이들은 명목상 지휘관 자리에 있었지만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실권은 수베타이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라쟌 공국에 대한 공략을 시작으로 1237년부터 1238년 사이에 진행된 러시아 공략은 몽골군의 연전연승으로 마무리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전투에 관해서는 이후에 별도의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러시아 정벌을 마무리한 서방 정벌군은 유럽에 대한 공격에 나선다. 헝가리와 폴란드를 쉽게 점령한 몽골군은 본격적인 서유럽 정복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본국으로부터 오고타이칸의 사망소식과 함께 귀환 명령이 떨어진다.
유럽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수베타이는 아쉽게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회군할 당시 수베타이는 68살의 노장군이었다.
▶ 다뉴뷰 강변서 73세로 숨져
이후 수베타이는 바투와 오고타이의 아들 구육의 대권다툼에 염증을 느껴 수도 카라코름을 떠나 다뉴브 강변 초원지대에서 여생을 보내다 73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아마도 바투의 부하로 있던 아들 우랑카타이가 있는 곳 근처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우랑카타이는 나중에 쿠빌라이의 휘하로 들어가 운남 대리원정을 성공으로 이끌고 지금의 베트남에 대한 정벌에 나서는 등 역시 수베타이의 아들답게 몽골의 전사로서 이름을 날린다.
바투 휘하에 있던 우랑카타이가 어떻게 쿠빌라이 휘하로 옮기게 됐는지는 기록을 찾지 못해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