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구화교, 사회적 지위 개선…고학력 신화교 등장 최대 변화”
2017-08-17 13:58
한·중 수교 이후 한국 화교 사회 변화
이 교수는 아주차이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대만 간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대만 국적을 보유하면서도 한국 화교 출신지의 9할이 산둥(山東)성이라는 점이 그들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관련기사 6면>
중국인의 한반도 이주는 고대시대 때부터 시작됐지만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단체를 조직, 사회·경제활동을 전개한 것은 1882년이었다.
조선 화교는 이때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약 60년간 조선 최대의 외국인 집단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포목상점과 중화요리점을 중심으로 한 상업, 야채재배를 중심으로 한 농업, 양말제조업과 주물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각 공사현장과 탄광 그리고 종교건축의 노동자는 일제강점기 각 분야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압박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 교수는 “화교의 강력한 경제는 1930년대 중일 간의 마찰, 특히 중·일 전쟁으로 인한 일제의 통제경제 실시로 야채 재배와 노동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파탄을 면치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포목산업과 관련해 “당시 외국인이 시장 30%를 차지했다는 사실만 봐도 포목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면서 “화교 초창기의 가장 규모 있는 산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곡물업과 함께 해방 이전 한국 사회의 양대 상업이었던 포목업에서 화교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면서 “포목상 사장들이 화교협회 회장을 맡는 등 화교 사회를 주도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해방 직후 남북분단으로 인해 한국 화교와 북한 화교가 형성됐는데 그때 인구는 각각 약 2만명과 5만명이었다”면서 “미군정을 등에 업고 한국 화교 무역회사는 대(對)중화권 무역에서 전체 무역의 7할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교 수립 이후 구(舊)화교 사회는 중국정부의 협조와 한국 사회경제의 요인에 의해 영주권제도와 지방참정권제도가 도입으로 이전에 비해 법적지위가 많이 개선됐다”면서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외국인이라는 지위 때문에 내국인과 같은 연금, 복지 등의 혜택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지난 25년 동안 화교 사회의 최대 변화는 신(新)화교의 등장”이라며 “2016년 현재 20만명의 신화교가 거주하고 있고 기존의 노동자 중심에서 유학생, 교수, 투자이민 등의 고학력 신화교로 전환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