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 메르키드 콤플렉스는 무엇을 남겼나? ②

2017-08-14 14:1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분노 삭이며 반전 기회로 활용
부르테가 피랍되면서 테무진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무분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분노를 삭이며 이 불행한 상황을 반전의 기회로 활용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사진 = 몽골군의 전투준비]

테무진은 1년 전에 검은담비 외투를 가지고 찾아갔던 옹칸을 카라툰으로 다시 찾아가 아내가 납치당한 사실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옹칸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담비 외투의 답례로 모든 메르키드를 섬멸하고 부르테 우진(왕비라는 의미)을 구해 주마!"
 

[사진 = 자모카 추정도]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이자 초원의 경쟁자인 자모카도 흔쾌히 메르키드에 대한 공격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테무진 형제의 침소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 내 애가 끊어졌다. 원수를 갚아 메르키드를 없애고 우진 부르테를 구하자!"
 

[사진 = 전투에 나서는 몽골군(영화 칭기스칸)]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합군은 메르키드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그리고 기습 공격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메르키드 진영은 초토화됐고 부르테는 무사히 구조됐다.

메르키드의 수령 토크토아 베키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 바이칼호 근처의 숲 속으로 달아났다. 대부분 메르키드인들은 사로잡히거나 도륙 당했다.
또한 여자들은 철저히 유린됐다. 몽골비사는 특히 테무진이 부르테와 재회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사진 = 몽골군의 전투]

"한밤중에 기습을 받은 메르키드 사람들은 셀렝게강 쪽으로 허둥지둥 도망가고 있었다. 도망가는 사람들 속에서 테무진은 ‘부르테, 부르테!’하면서
아내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 도망가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한 여인이 수레에서 뛰어내려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부르테였다.
그녀는 밤중인데도 빛이 나는 테무진의 말고삐와 밧줄을 알아보고 그것을 움켜잡았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서로를 알아 본 이들 부부는 격정의 눈물을 흘리며 힘차게 끌어안았다."

▶ 자모카와 공동유목으로 도약 발판
 

[사진 = 툴강(울란바토르)]

연합 작전이 끝난 뒤 옹칸은 툴강의 카라툰으로 회군했다. 그러나 테무진과 자모카는 함께 자모카의 본거지인 코르크낙 주부르로 향했다.
테무진이 공동 유목을 안다 자모카에게 제의했고 자모카가 이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사진 = 코르크낙 주부르]

코르크낙 주부르는 어떤 특정지점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수십 KM 길게 펼쳐져 있는 초원지대를 말한다.
 

[사진 = 코르크낙 주부르의 밀밭]

직접 찾아가 본 그 곳은 지금도 넓은 초원 지대로 남아 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들은 드물어 간간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군데군데 넓은 밀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자모카의 진영으로 파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오래 동안 감춰 두었던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시작한다.
특히 메르키드 연합공격의 성공으로 테무진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고 나름대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해 갈 수 있게 됐다.

▶ 딴 핏줄을 장남으로 받아들인 테무진
이 사건으로 테무진은 높이 날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들 가족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준 불행한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메르키드족에게 납치돼 가 칠게르 뵈쾨의 부인으로 주어졌던 부르테! 다시 돌아 온 그녀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다. 부르테는 곧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 아이의 핏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 호엘룬만이 부르테를 받아들이고 아이를 아들로 인정하라고 충고했다. 테무진 역시 말이 없었다.

▶ 나그네처럼 왔다가 나그네처럼 가라"
비록 자신의 뜻에 의해 벌어진 상황은 아니지만 부르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 테무진의 처분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그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신호였다.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테무진은 아이에게 ‘주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바로 ‘나그네’라는 뜻이다. 나그네처럼 왔다가 나그네처럼 가라는 의미로 지어 준 이 이름에는 당시 테무진의 고통스럽고 허전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을 것이다.
 

[사진 = 뮤지컬 칭기스칸]

칭기스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몇 차례 만들어졌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져 국내 상영된 영화는 바로 이 부분을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다.
후일 일한국의 라시드 웃딘이 집필한 역사서 집사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부르테와 칭기스칸 가계의 명예를 지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기록한 몽골비사는 이 부분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었고 왜곡하려는 의도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 세우게 되는 계기
그렇게 칭기스칸 가계의 장남이 된 주치! 그는 나중에 성장해 동생들로부터 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칭기스칸의 네 아들 가운데 특히 둘째 차가타이와 셋째 오고타이는 주치를 형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내 툴루이는 주치를 큰형으로 대접하고 가깝게 지냈다. 그런 관계가 훗날 몽골의 후계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중에 칭기스칸의 호레즘 원정에 동참했던 주치는 전쟁이 끝난 뒤 본대로 귀환하지 않고 시르다리아 강 위쪽 킵차크 초원지대에 눌러 앉는다.

킵차크 지역에 주치 울루스를 세워 나중에 아들 바투가 킵차크한국(汗國)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을 닦는다.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고 깊었다.
칭기스칸은 수차례 사람을 보내 주치를 자기 곁으로 불러 들였지만 결국은 돌아오지 않은 채 칭기스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몽골 역사는 이것을 메르키드 콤플렉스라 부른다. 칭기스칸이 자신의 핏줄이 아닌 큰아들 주치에게 그토록 각별한 애정을 보인 데에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메르키드족에게 시집가다 납치된 어머니 호엘룬에게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핏줄에 대한 의심을 받는 고통 속에 살아 온 그가 누구보다도 주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호엘룬을 납치했을 당시 그녀가 이미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메르키드의 핏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메르키드가 한국을 부르는 이름 ‘솔롱고스’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칭기스칸을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주치는 아버지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칭기스칸의 서하 원정 중에 전해진 주치의 사망 소식은 칭기스칸의 병을 더욱 깊게 만들어 곧 이어 칭기스칸도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나 주치를 이은 아들 바투는 뛰어난 용맹성과 지략을 지닌 인물로 아버지가 터를 닦아 놓은 곳에 킵차크한국 세워 기반을 굳힌 것은 물론 유럽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어 유럽에 칭기스칸의 전설을 심어 주었다.
 

[사진 = 몽골 초혼의 황혼]

이 킵차크한국은 대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100년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러시아 역사에 타타르 이고 (Татар Иго〓타타르의 멍에)라는 큰 상처를 안겨 주게 된다.
인간사 한 순간의 비틀림이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돌려놓게 된다는 사실을 부르테의 납치 사건에서 비롯된 메르키드 콤플렉스의 경우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